지렁이 농장 역할을 하는 <통>에 음식 찌꺼기로 지렁이를 키우면서, 지렁이 똥이 섞인 양질의 흙을 한 움큼이라도 챙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후배가 먼 나라에서 작은 글을 보내왔다. 베란다에 대책 없이 마련해 놓은 채소 화분들을 위한 이 수고 중에도 그니의 요즘 관심은, 오직 지렁이의 생사뿐이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 발코니라고 하는 게 맞다-
이 땅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쯤이었는지, 그 직전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여튼 자기 발로 걸어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그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인도에서, 네팔에서 뚜벅뚜벅 홀로 걷고 있다는 안부를 전해오기도 했었다.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먼 외국에 살면서 모 대학의 교수로서 그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니는 오늘도 짜이(인도식 밀크 티)를 마시면서 스콧 니어링 닮은, 반쪽과 함께 고뇌의 무게를 재는 거울과 거리를 두고 있지 않는 듯했다.
스콧 니어링.
그는(美,1883~1983)은 근본주의자이며 환경주의자이고 평화주의자였다. 치열한 젊은 날을 살았지만 말년엔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적 생활을 했다. 은둔과 노동, 절제와 겸손, 채식주의와 검소함으로 조화로운 삶을 살다가 100세가 되던 해에 스스로 곡기(穀氣)를 끊음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탁 트인 곳에 있고 싶다. 그리고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면 빵을 버리고 할 수 있다면 물도 마시지 않으리라. 나는 온 힘을 다해 나의 삶을 충만하게 살았으므로 이제 기쁜 마음으로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태어날 때 타인(모친)의 고통을 빌리지만 죽을 때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저 혼자 죽는 게 사람이다. 태어나는 시각은 곧 죽음의 시작이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시간은 우회를 모르는 직선이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종교적인 잣대로 재지 말자. 이미 100세가 넘은 사람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단정이다. 차라리 그가 생전에 남긴 말. 나는 <충만>하게 살았고 <기쁜 마음으로 희망에 차서> 간다. 그리고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라는 고백을, 죽음의 문턱에서 스스로 할 수 있을 만큼 내 삶을 진지하게 살았는지,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있을지, 되짚어 본다.
수년 전, 그니를 통해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을 소개받았다. 그 즘은 강원도의 효석 생가가 있던 봉평을 드나들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채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이 많은 공감을 주던 때였다. 그러나 다시 도시로 나와,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 이리저리 치이면서 까막 득하게 잊고 있던 스콧 니어링을, 그니의 글로 다시 되돌아본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과연 잘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가? <충만한 삶을 살 것.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살 것. 균형 잡힌 인격체로서의 삶을 살 것.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살 것> 이렇게 충분히 살고 맞는 죽음이라면,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고뇌의 무게를 재는 거울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지 않으면서.
밖은 이미 어둡고, 어둠을 등진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유리창에 비친 것은 꿈도 아니고 놀이도 아닌, 지금 여기, 그 속에서 현재의 현전으로 서 있는 ‘나’이다. 저 먼 시간 속에서 온 나는, 현재의 사라짐 속에서 나 자신을 회수하여 다시 새로운 현재 속에 회귀시키는 ‘나’이고, 그 ‘나’를 딛고 다른 ‘나’로 나아가는 타아(他我) 일 것이다.
“좀 더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 다른 사람, 또는 하나의 이념과 목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스콧 니어링의 글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