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Tabula rasa

스킵과 해머

포에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마무리 못하고

by 장영철 Francis

책을 완독(玩讀)한다는 기본 의미는 ‘글의 뜻을 깊이 생각하며 읽는다.’라는 말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비판하지 않고 오로지 읽기만 한다.’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시쳇말로는 ‘책 한 권을 뽀갰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스킵 읽기와는 상치되는 개념이다. 어쨌든 이 나이 먹도록 내게는 몇 번의 시도에도 완독 하지 못한 책이 몇 권 있다.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책도 그중에 한 권이다. 독일의 철학자이며 유물론자로도 유명한 루트비히 포에르바흐가 1841년 출간한 책이다. 30여 년 전 개신교 계열의 대형 서점 종로서적 출판부에서 발행했다. 이 책은 당시 지적으로 목말라하던 젊은이들에게 오아시스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포에르바흐는 말한다.

‘... 신이란 이상화된 인간 이 외의 어느 것도 아니다. 때문에 신의 본질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질을 아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임을 자각하고 신학을 인간학에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원은 우리가 노력한 결과물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포이어바흐의 이 논리는 굉장히 위험한 시각이다)


그 책을 처음으로 접했던 그 시절. 이렇게 어느 정도 이해되는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은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독일어를 한글로 번역한 글인데, 마치 초등학생이 헌법 책을 읽을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난해했다. 그때 나는 그 책 앞에서 참 비참했다. 아~ 이 책이 세상이 나온 지 180년이 넘었는데, 쪽수도 150쪽 밖에 되지 않는 분량인데... 결국 나는 그 책 앞에서 손들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한번 더 그 책에 욕심을 내고 -이제 세월도 흘렀고 내 지적 내공도 깊어졌으니 하는 자만감에- 손을 댔으나 결국 또 다 읽어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 디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최근 다시 그 책을 펼쳤다. 그런데 문득 내가 그 책을 완독 했다고 치자. 그랬다고 해서, 뭘 어찌 될 건 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씨 하나 빼지 않고 다 읽었다고 해서 내가 작가의 의도를 전부 이해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스킵 읽기도 망설여진다면, 그건 너무 가식적이다. 차라리 이렇게 골방에서가 아니라 이리저리 싸돌며 불현듯 만나는 사상들이(이런저런 생각들) 내겐 더 진정성 있게 다가올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면 단 한 발자국만이라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확신에서.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를 시키다가 우연히 만난 프레드릭 니체. 19세기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이다. 그러나 해머를 휘두르듯 신은 죽었다, 라는 그의 선언으로 그를 반(反) 그리스도인으로 폄하할 일은 아닌 듯했다.

이런 종교 비판적 태도를 가진 동시대의 포이어바흐나 니체는 살아생전 악한 철학자라고 비난받거나 그들의 책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살았던 당시 ‘시대정신’은 그들의 명제가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내세우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라고 여긴 것은 아닐까? (지독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역시 이번에도 나는 니체의 책을 단 한 권도 다 읽어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에 관한 강의를 며칠 동안 찾아 듣고, 써머리 된 자료를 읽으면서 나름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다. 니체에게 있어서 神(19세기 유럽인들에게 최고의 가치를 상징)의 죽음은, 곧 그로 말미암아 허무주의가 도래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 허무주의가 문 앞에 서 있다. 모든 손님들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 손님은 어디에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인가?...”

니체가 말한 신이 죽었다, 라는 것은 그 명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 상황 앞에서도 자긍심을 잃지 않는 고귀한 정신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는 최근 포이어바흐로부터 스킵을, 니체로부터 해머를 빌렸다. 그리고 이해되지 못한 것은 이해하지 않은 채 뛰어넘고 있다. 제기된 명제에 대해 계속 ‘왜?’라고 질문하면서 해머를 휘두른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으로부터의 우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겠다는 다짐으로 희열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또 어느 순간에는 식상하고 허무해한다. 허무는 보기보다 힘이 세,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구약의 코헬 렛서 6장 12절 말씀처럼...

[인간이 살아 있는 그림자처럼 보내야 하는 허무하고 한정된 생애에서 그에게 무엇이 좋은지 누가 알리오? 인간이 죽은 다음 태양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려 주리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 꽃이 지고 있습니다 -도종환의 시-



사족>

1880년 니체는 그의 명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하고 말했다. 그 말에 웬일인지, 신은 침묵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1900년 어느 날 신은 선언 했다. 이제 <니체는 죽었다>라고. 맞다. 니체는 그해에 생을 달리했다. 며칠 전 그 포에르바흐(불 개천)와 니체를 우연히 조우한 일이 있어서...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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