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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22. 2022

만년필 이야기

8년 전 오늘 (5/22) 쓴, 사소한 내 삶의 여운들

며칠 전 딸이 생애 첫 월급을 받았다며, 선물을 사 주겠단다. 뭐든 말만 하란다. 대견스러운 마음에 미소 지으면서 나는 빨간 내복이 아니라 소박한 만년필을 생각했다.   


법원에 근무하셨던 부친의 필체는 참 좋으셨다. 휘갈겨 쓰시는 글씨체는 어린 내겐 로망이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고 말하는 걸까. 덕택에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학교 숙제 같은 것을 휘갈겨 쓰면 매를 벌기에 정자체, 일기나 편지는 어쭙잖은 필기체로 쓰곤 했다. 물론 부친의 글씨체를 흉내 낸 거였지만.

이런 내게 부친은 중학교 입학 선물로 만년필 세트를 사주셨다. 파이롯트였다. 당시만 해도 펜을 펜대에 꽂아 잉크를 살짝 찍어 글씨를 쓰는 것이 흔하던 시절이라, 좀 여유 있는 학생들에게 만년필 사용은 자연스러운 거였다. 이렇게 펜을 사용하면 멋진 글씨체를 갖게 된다는 낭설이 나돌던 시절이기도 했다. 


게다가 등, 하교 인근 길 풍경 중 하나. 자전거에 온갖 부품을 담은 007 가방만 한 나무로 만든 박스에 안장을 받힘 삼아 만년필이나 샤프를 수리해 주던 노점상들에 대한 기억도 아스라하기만 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만년필이 나와 함께했다. 대부분 그리 비싸지 않은 대중적 가격의 만년필들이었다. 요즘 내 주위에서는 거의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는 거 같다. 나 역시 글을 쓸 때, 편하다는 이유로 펜이나 만년필보다는 컴퓨터 자판을 더 애용한다. 그래도 내가 꼭 만년필을 사용할 때가 있다. 


오래전부터 써 오고 있는 영어성경 쓰기와 중요한 서명을 할 때다. 볼펜이나 플러스 펜 등이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는 일종의 권위 감(?) 같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단조로운 선으로 이뤄진 볼펜과는 달리 만년필의 획은 굵은 부분과 얇은 부분이 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물론 수시로 잉크를 보충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으로 번잡스럽기는 하지만.   


그런데 한참 잘 사용해 오던 이 만년필(파커 프런티어)이 얼마 전부터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자주 잉크가 말라붙어 불편했다. 아마 10 수년 넘게 쓰다 보니 헐거워졌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그동안 몽블랑, 워터맨, 파커 등을 기웃거려보고 있다가, 최근 파버카스텔의 ‘엠비션 코코넛 우드’를 맘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뭐든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에 -이것 때문에 아내로부터 자주 놀림을 받지만- 내 오랜 만년필은 아직도 나를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잘 버텨주고 있다.          


몇 해 전 만년필 브랜드 파카(PARKER)에서 창립 125주년 기념으로 16개의 다이아몬드와 18k 금으로 제작된, 단 한 개의 '듀오폴드 자이언트 리미티드 에디션'을 선보이면서 4천8백만 원에 판매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정한 만년필 마니아가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 이름도 길고 비싼 만년필에 대해, 나는 욕심을 1도 느끼지 못했다. 경제적 여유를 차치하더라도.   


그러나 출장 등으로 서울에 갈 때면 꼭 교보문고(광화문 점)에 들러 책도 보고 옆 매장에서 전시·판매되고 있는 만년필들을 보면서... 그때마다 나는 욕심내어 꼭 찾고 싶은 추억의 만년필을 떠 올리곤 한다. 


주로 파커만 쓰던 내게, 모델 이름도 잊힌 독일제라고만 기억되던 만년필. 그동안 나는 그 만년필을 찾을 수 없어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딸이 선물 운운하는 덕에 인터넷에서 만년필을 들여다보던 중 그렇게도 찾고 싶었던 그 만년필의 모델명과 구입처를 아주 우연히 어떤 사이트에서 알게 된 것이다.          


감동하고 흥분했다. 잉크 주입방식이 요즘같이 컨버트 식이나 카트리지 식이 아니라 배럴 뒷부분을 돌려야 하는 플런저 방식을 택하고 있는 ‘슈퍼 로택스’. 4종류 중에서도 ‘버건디’ 색상에 가장 얇은 EF펜촉. 내가 오랫동안 찾던 바로 그 만년필이었다. 


단종된 지 수십 년이 되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제품을 구입할 수는 없고 일부 마니아들의 소장품을 통해서만 인터넷상에서 매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 비싼 것도, 소장가치도 없는, 흔한 만년필이라고 남들은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중·고등학교 시절의 참 많은 추억을 기억나게 하는 물건이다.  


며칠 뒤, 내 손에 그 만년필이 들어오면 잉크를 넣는 내 손을 분명 떨 것이며, 회상된 내 오래전 기억의 파편들은 까까머리 아이를 소환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의 이야기들을 더듬어 맑게 쓰고 아주 멀리 있는 벗에게 긴 편지를 써 보낼 생각이다.       

   

"나는 작가다훗날 길에서 갑자기 쓰러져 죽거나 객지에서 여행 중에 죽는다면주머니에서 만년필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 어느 낯선 작가의 글 중에서            



 독일제 만년필 ‘슈퍼 로택스’. 4종류 중에서도  ‘버건디’ 색상에 EF펜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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