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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May 24. 2022

Planned neglect

계획된 태만

내 침대 머리맡 또는 주위에는(거실 등) 여러 권의 책이 나 뒹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여러 종류의 책이다. 쉽게 읽히지 않는 동서양 철학, 종교, 각종 사상사 종류의 책이 있는가 하면 세계사나 예술계통, 소설류 같은 가벼운 책들도 있다. 심지어 카툰 책도 있다. -물론 특정 전문분야를 다룬 것이긴 하지만-     



난해한 책을 읽다가 흥미가 떨어지면,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뒤적인다. 그러나 너무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다 보면 금방 식상하듯, 그때는 딱딱하지만 건강에(?) 좋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 같은 책을 읽는다. 작정한 책을 한 번에 완독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갈아타기 식으로 책을 읽는 건, 나의 오래된 독서 습관이다.     


'어쨌든 책은 좀(?) 어려워야 한다' 하는 게 내 평소 지론이다. -고 이어령 박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지닌 독창성과 상상력의 원천은 어려운 글들을 읽으면서 모르는 부분을 끊임없이 메우려는 것에서 생겨났다. 내용이 어려우면 ‘생각’하게 된다.”라고-      


책을 읽다 보면 종종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마치 마라톤 같은 것을 계속하다가 만나는 신체적 쾌감을 ‘러너스 하이’(Runner' High)라고 말하듯, 나는 이것을  ‘리더스 하이’(Reader's High)라고 이름 지었다. 사전에 이 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이 말을 심심치 않게 쓰고 있다.     


말이 옆으로 샜다. 언젠가 한번 이 난해한 상황, 내 독서습관을 지인에게 설명을 하는 데, 그가 못 알아듣는 듯했다. 당연한 일이다. 내 책 읽는 방식이 유별나기도 하지만, 내 표현력의 한계 때문에 그가 이해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Tv 예는 프로에 출연한 어떤 셀럽이, 나와 유사한 독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동면 상련의 심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그의 표현이 참 흥미로웠다. “나는 이 책 저책을 방바닥에 깔아 놓고 ‘리모컨으로 TV를 돌려 보듯’이 돌려 아니 골라 책을 읽는다.” 참 간결한 표현이었다. 앞으로 나도 그의 표현을 빌려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내 독서 방식은 한 마디로 ‘리모컨 독서법’이라고.     


며칠 전 <When a concert violinist was asked the secret of her success, she replied "Planned neglect">라는 문장을 보고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누군가 그녀의 성공의 비결을 묻자 그녀가 한 마디로 답을 한 것이다. "Planned neglect"라고.     


우리말로 하면 태만은 태만인 데 그 '태만을 계획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한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 말고 나머지는 모두 태만하기로 계획했고 그걸 실천했기에, 오늘날 그녀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연주자가 된 비결이라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산다. 어떤 이는 생업에, 종교에, 공부에... 다들 나름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슈퍼맨이 아니고서야, 잘 먹으면서 풍요롭게 살아야 하고, 신앙생활도 해야 하며, 외국어든 뭐든 열심히 배워야 하고, 취미나 봉사... 등 한정된 시간 내에서 모든 것을 퍼펙트하게 해 낼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저 연주자의 논리대로라면 어떤 것들은 방치는 아니더라도 태만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몇 가지 것들에 대해 게으름인지 무관심인지 혹은 태만인지 몰라도 포기(?) 한 것들이 있다. 물론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다가갔다가 내 기호와는 맞지 않아 발길을 끊은 것들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들은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미련을 가지고 오늘 이 나이까지 질질 끌고만 다녔다면 죽도 밥도 아무것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리모컨 독서법'이든 '계획된 태만'이든, 그것들이 우리 귀에 들리고, 보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오픈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셀럽의 독서법에는, 전혀 이해와 공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신변잡기 개그에 헤픈 웃음만 실실거릴 것이다. 그리고 평이한 영어 한 문장에서 계획된 태만이라는 단어의 숨은 뜻을 알아내기는커녕, 따분한 하품만 해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오픈 마인드’란 모든 것을 다 받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오픈 마인드란 “내 관점을 기본 베이스로 삼되 오래되었든 새로운 것이든, 그것이 바르다면 내 관점을 포기할 수도 있는 열린 마음”을 의미한다. 만일 내 고정된 관점이 베이스로 깔려 있어야지, 장애물로 고착화되어 있다면, 그건 우선적으로 지양하고 제거해야 될 것이다.     


벌써 이 해의 반 가까이에 다가서고 있다. 아직까지는 연초에 계획한 책 읽기와 쓰기가 (여러 가지 공부 등) 순조롭게 잘 이어지고 있다. 이런저런 핑계로 스스로 타협하고 싶을 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럭저럭 잘 이겨 내고 있다. 그래도 늘 뒤돌아보면서 스스로를 챙기고 어느 정도 태만해도 괜찮을 것들에 대해선 여유로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  너무 빡시게 사는 것도 재미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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