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Tabula rasa

<인쇄 내>를 좋아하는지?

다시 김훈의 책을 뒤적이다가 15년 전, 봄에 쓴 글

by 장영철 Francis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칠 때마다 나는 내음. 서점에서도 느껴지는...

<인쇄 내>를 좋아하는지.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종각 옆 종로서적까지는 멀지 않았다. -교보문고가 아니라 종로서적이라는 서점을 안다면... 쉰 세대다- 까까머리 시절, 책가방을 옆에 끼고 하교 후엔 그곳을 참 많이 들락 거렸다. 그곳에서 많은 책을 읽어다, 라기보다는 정확한 표현은 엄청 훑어보았다. 당시 종로서적은 이 나라 최고의 서점이었다. 책이란 책은 다 모여 있었고, 책을 안 사고 한참을 어슬렁거려도, 직원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오르락내리락하며 <인쇄 내>에, <글 내>에 행복했다. 그래서일까, 학부 땐 문학을 전공했고 첫 직업도 그 분야에서 한참 동안 일했다.


취재와 기사 작성. -교정, 분해, 편집, 제판, 인쇄, 제본... 등을 지켜보고- 그 바닥에서 10수 년 있다 보니,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그러다가 그중 <베스트셀러>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원칙이 하나 생겼다.


매스컴에서 요즘 제일 잘 팔린다고 부추겨지는 책은, 절대 서둘러 사보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고 그런 문제점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한 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책이, 절판의 칼날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좋은 평이 꾸준하다면 그땐, 간혹 만나보기도 한다. 그런데 며칠 전, 이 원칙을 깬 일이 생겼다. 서점에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신간을 평소 나답지 않게 덥석 사고 만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참으로 재미없고 짜증 나는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소설. 무능한 왕의 치욕으로 얼룩진 기록.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는 삼전도의 굴욕을 이야기하는 푸념. 아무리 <칼의 노래>로 강호에선 이미 천하를 평정한 적이 있는 김훈의 신작이라지만... 하고 버티다가 그의 한 문장에 끌려서, 그만 사고 말았다.


<실천 불가능한 정의인가, 실천 가능한 치욕인가> 정의와 치욕. 아. 풍전등화 같던 그 성(城) 안에서도 정의가 있었고 치욕이 있어, 다툼이 있었단 말인가.

<남한산성> 중에서


370년 전인 1636년(병자 년) 수 십만 청병의 진격을 피해 인조의 행렬은 남한산성으로 파천(播遷)한다. 약소국의 치욕은 이렇게 시작된다. 47일간 고립무원에서의 기록은 작가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표현이 절제되어 있었다.


낯선 낱말들이 낯설지 않게 어우러져, 짧지만 깊은 문장으로 만들어지고 툭툭 던지는 말투는 섬세한 심리로 묘사되어 읽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던진다. 기름진 수사나 끈적대는 비유는 없지만 길을 묻는 과객의 어조로 묻는 인조의 한탄 어린 물음이, 읽는 이로 하여금 당황하게 하면서.


책 읽기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났지만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아직 반도 읽지 않았는데,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등줄기가 서늘했다. 목젖은 뜨겁고 깊은 한숨이 나며 가슴이 저려왔다. 답답하고 서글프다 못해 참담했다. 평소 같으면 앉은자리에서 내리읽고 일갈했을 책 한 권이, 나를 무척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있던 지난밤. 한 형제의 축일을 핑계 삼아 생맥주 몇 잔을 달게 마시고 들어 와, 잠들었다. 잠결에 나는 분명 보았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되는 것을. 확실히 들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나무들이 길게 우는 소리를.


그 소리에 잠이 깨 거실 소파에서, 남한산성과 다시 마주 앉은 시각은 새벽 4시경이었다. 아직 해는 어둠 속에서 미동도 않고 창 밖 바람은 무언가로부터 쫓기는 듯 산만하게 불어대고 있었다. 책장을 펼치지 못한 나는 멍하니 허공에 넋을 놓고 있었다.


문득 (그 때나 지금이나 민초는 고통과 동의어인가?)라는 말이 스스로에게 던져졌다. 작가는 ‘남한산성을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라고 못 박고 있지만, 어떤 이는 한. 미 FTA와 겹쳐 읽기도 하고, 모 정당에선 남한산성 진지론을 들고 나오고 있다. 나는 새로운 독법(讀法)이 필요할 것 같다. 완독 하는데 며칠 더 걸리더라도. 그동안은 <인쇄 내>로만 만족해야 될 것 같다. 쉬워 보여도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 책 때문에 이 밤이 길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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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작가는 글을 연필로 썼다. 김훈도 그렇다. 이 아날로그적인 모습이 가끔 정감이 간다. 김훈의 필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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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의 작품이 영화화에 되는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나는 단점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김훈은 글로 만나야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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