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에 가 본 사람 손!

2002년

by 오롯이

여러분은 2002년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월드컵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 당시 기사를 빌려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날고 긴다는 포르투갈을 제치고 이탈리아를 꺾고 스페인을 침몰시키며 파죽지세로 4강 고지에 올라섰다.

2002년 6월 한 달, 메가톤급 환희를 안겨준 2002 한일 월드컵에 우리는 몰아지경으로 빠졌다.

대한민국은 하나가 되었다."


졸업 후 유치원으로 취업을 하고 혼자 자취방에서 월드컵을 보노라면, 참 쓸쓸했다. TV에서는 붉은 티를 입고 모르는 이와 어깨동무를 하며 하나가 된다는데.... 나는 골이 터질 때마다 '윽~' 외마디로 기쁨을 참아야 했다.

혼자니까 환희 뒤에 몰려오는 뻘쭘함이 싫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2002년 월드컵보다 더 깊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이불킥이 절로 나오는 그런 일이기에 추억이라 미화하기보다 단순 기억이라고 하고 싶다.

서두가 길지만 이 설명을 빠트리면 안 될 것 같다.

내가 근무한 유치원은 성당부설로 아침에 등원을 하면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5월이면 성모님의 달로 장미꽃을 받치고, 토요일마다 어린이 미사를 보고, 나도 운명처럼 한국 성인이신 효주아녜스를 따라

효주아녜스란 세례명을 갖고 세례를 받았다.


성당에서는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교도소, 군부 대에가 종교활동을 하신다. 당시 우리 교구가 관리하던 곳이 바로 청송교도소였다. 우리나라에서 악명 높은 교도소가 어디인지 누구나 아는 청송교도소!!!

23,510명 청송 군민들이 교도소가 있어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교도소를 더 늘려 다라는 소식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청송과 교도소는 뭔가가 끈끈한 곳이다.

그 악명 높은 청송교도소, 그곳에 내가 갔었다.

신부님과 수녀님은 매주 교도소에 가 미사도 보시고 교화활동에 힘을 쏟으셨다. 재소자들의 편지를 받아 담당 수녀님께 전해드리기도 했었다. 당시 내용이 너무 궁금했지만 알 길은 없었다. 추측만 할 뿐.

그 종교활동 중 하나가 유치원 재롱잔치를 거기서 공연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치원에서는 재롱잔치로 1년을 마무리하곤 했었다. 첫 교사생활에 첫 재롱잔치라니... 내 의욕과 열정은 상상초월이었다.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준비했었다.

업체에서 의상을 맞추는 건 의미가 없다는 원장수녀님의 뜻에 따라 나는 손수 의상을 만들고, 꾸며야 했다.

6살 분홍반에 셋 리스트는 <말괄량이 길들이기, 사랑의 이름표, 소금장수, 차력쇼, 리듬합주>였다.

20년이 훌쩍 지난 건데 기억이 난다. 교도소에 가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사항이 있었다.

신분을 증명할 주민등록증 사본을 보내야 했고,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도 있었다.


"선생님, 거기에는 정말 위험한 곳이고 어떤 돌발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잘 지켜 주어야 해요.

목, 팔, 다리 노출이 되는 옷 금지, 단독행동 금지, 향수 및 진한 화장 금지, 재소자와 눈 마주침 금지예요. 알겠죠?"


의상을 갈아입혀야 하기에 같이 갈 자모님들께도 철저히 교육을 하고 갔었다.

공연 당일, 관광차를 타고 교도소에 도착했다. 정말 높고 무거워 보이는 철문 몇 개를 통과해야 했다.

다른 곳보다 더 추운 청송지역, 한 겨울이었으니 얼마나 춥고 스산했는지 칼바람 소리가 났었고

그 긴장감은 말할 수 없다.


"반드시 저희의 인솔을 잘 따라 주시고, 혼자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교도관들의 당부와 미리 보낸 인원 명단을 재차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각 실과 실을 갈 때마다 교도관의 열쇠꾸러미로 철문을 열고 잠그고를 반복해 들어간 그곳 내부는 온통 시멘트 회색뿐이고 벽엔 "정숙"이란 글자가 더 또렷하게 보였었다.

점점 대공연장과 가까워지는 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자체 밴드의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하나의 문만 더 열면 그들을 만나는데 정말 떨리고 긴장이 되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들어가려 고개를 들었다. 큰 강당을 가득 채운 파란색 죄수복의 물결과 까까머리들이 일제히 우리를 돌아보고 웅성거렸다.

또 하나 인상적인 건 코를 자극하는 남자들의 냄새였다. 사춘기 남동생 방에서 나는 냄새의 100배??

나도 죄인이 된 것 마냥 고개 푹 숙이고 걸었다.

그때 어떤 재소자가 손을 뻗어 분홍반 아이들을 만지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것을 막았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희긋희긋한 머리의 할아버지였다. 아마도 자식, 손주가 생각났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선 분홍반의 보호자이기에 막았었다. 또 "모범"이란 견장을 찬 모범재소자가 보디가드처럼 안내도 해주었다. 생각보다 긴 관객석을 지나 대기실로 갔다. 교도소는 추운 곳이다. 아이들이 추울까 봐 대기실에는 난방을 특히 신경 써서 해 주셨다.

초록반(만 5세), 분홍반(만 4세), 노랑반(만 3세) 이렇게 골고루 무대를 꾸몄다. 아이돌급의 폭발적인 반응과 호응이었다. 삭막하고 따분하고 온갖 부정적인 분위기의 교도소에서 어린아이들의 재롱을 본다는 것은 상상 그 이상의 꿈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의 웃음을 지어 보였겠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에 두고 온 자식들, 손주를 떠올리느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후회를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드디어 분홍반의 차례가 되었다. 독자분들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무대에 오르면 평소 잘하던 것도 안 하고

울고, 딴짓을 하기에 앞에서 교사의 지시에 따라 같이 율동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도 교도관이 지정해 준 자리로 가 준비를 했다. 아이들과 눈을 맞춰야 하는데 이 녀석들도 이런 큰 무대가 낯선지, 아니면 많은 인원에 나를 못 찾는 것인지 어리둥절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이 나온다.

꽤 신나고 귀여운 가요에 재소자들도 박수로 힘을 실어준다.


그런데.... 어떡하지, <말괄량이 길들이기> 팀이 나를 안 본다.

나는 쪼그려 앉았다가 '선생님 여기 있어~'하듯 점점 동작이 커지고 말았다. 분홍반 총 5개 무대에 나도 덩달아 5번 일어났다. 우여곡절 끝에 공연이 끝나고 퇴장하는데 재소자들이 한결 풀린 분위기에서

"꼬맹이들, 잘 가"

"잘 커라~"

"공연 잘 봤어."

"선생님 고생하셨어요"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도 약간의 목례로 답했다.

그들은 잘하는지 못하는지 보는 게 아니고 그 자체로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차를 타고 오는데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다들 조용히 왔다.


다음날, 담당 수녀님을 만났다. 그간 준비한 것과 잘 마무리한 것에 감사함을 서로 나눴다.

그런데 수녀님의 한 마디에 나는 놀랐다.


"선생님, 어제 관객석 봤어요?"

"아니요. 애들 보느라 관객석 볼 수도, 볼 용기도 없었어요."

"하하하하, 관객들이 애들을 봐야 하는데 선생님이 춤을 더 열심히 춰서 선생님만 보던걸"

"네?!?!?!?!?!?!"

"선생님 빨간 더플코드 입어서 더 눈에 띄었을 거야. 나 그거 보고 얼마나 웃었다고."


아...... 그렇다.

내 제자들의 귀여운 재롱잔치 무대를 맘껏 뽐내고 싶었던 내 열정이 너무 과했던 것이다.

내가 거기서 춤을 추다니.... 하필 왜!!! 많은 코트 중에 빨간색을 입었던 걸까.... 왜왜왜!!!

그날 나는 하염없는 이불 킥과 자기 최면을 걸었다.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닌데 뭘~됐어, 됐어'

'내가 미쳤나 봐, 거기서 왜 일어나냐고~~~'


20년이 훨씬 지난 일인데 이렇게 꺼내다 보니 그날의 생생한 기억이 다 떠오른다.

그 다섯 곡의 춤도 기억이 난다... 하하하하하하하

작년에 그 성당에 가 보았고 유치원도 들렀다. 유치원 놀이터와 성당 앞 은행나무, 성모마리아상도 다 그대로인데 안나아주머니와 문수녀님, 신신부님, 엘리자벳아주머니는 안 계신다.

또 유치원이 2023년 폐원을 했다고 한다. 나의 첫 직장이 없어졌다니 속상함에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분홍반 첫 제자들이 잘 지내게 해 주시고, 어딘가에 계실 유치원 관계자 여러분도 건강하시길"

이렇게 글로 남길 기억을 주신 것에 감사하고 싶다.

아니 열정 가득한 20대 추억에 감사한다.


(여담 한가지, 그때 원장수녀님이 나보고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면 어떻겠냐고 권하셨다.

이 사실을 안 그 당시 남자사람친구, 지금의 남편의 반응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ㅎㅎㅎ)

성당 입구 성모마리아 상
가을이면 나를 바쁘게 했던 모과나무와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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