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질문이 있다.
"최근 들어 손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마지막으로 편지를 받았던 적이 기억나시나요?"
편지라고 하면 상대방의 안부, 소식, 용무 따위를 적어 보내는 글이다.
나에게 편지는 정말 특별한 것이기에 이렇게 주제로 정해 보았다.
내가 살았던 곳은 경북 안동, '선비의 고장'이란 타이틀을 가진 내 고향이다.
내 집에서 태어나 한 번도 이사를 가지 않고 그곳에서 그렇게 자랐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해 자연스럽게 집을 떠났다.
내 집은 시내와 읍내 중간, 말 그대로 어중간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유치원부터 시내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지나 학교에 갔어야 했다. 또 대학에 갈 때까지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다. 불편함이야 말할 수 없었지만 통신사에 물어보면 늘 거절이었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개통하려면 동네에서 최소 세 가구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고객님 댁만 가지고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재미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고1 여름방학, 친구 집에 놀러 갔다 본 잡지책에서 펜팔 신청 엽서를 보았다.
반심반의 하며 신청서를 보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을 때쯤... 정말 신기하게 전국 각지에서 편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어떻게 된 것이냐 물으셨고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군복무 중인 군인, 또래 친구들까지 그렇게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단 한 줄의 주소와 이름만 보고 편지를 써준 그들이 고마워 답장은 꼭 썼었다. 그중 인연이 닿아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은 친구가 3명이었다.
전남 여수에 사는 친구, 강원도 삼척에 사는 친구, 부산에 사는 또래의 친구들이었다.
내 특별한 친구들을 떠올려 보자면 이렇다.
여수 사는 친구는 늦둥이로 태어나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님과 형이 있었고 심지어 조카까지 있었다. 안타깝게도 어머니가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혹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차에 나를 만났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편지로 슬픔을 풀어갔던 것 같다. 글씨가 너무 예쁜 이 친구와는 일주일에 두 통씩 편지를 주고받았었다. 나는 유치원으로 취업을 나가고 이 친구는 군입대를 했다. 누가 그랬던가, 군대 얘기는 뻔하다고...나는 너무너무 재밌었다. 상상할 수 있으니 흥미로웠다고나 할까?! 강원도 고성 전방 GOP근무할 때 군 생활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게 들었었다. 외로운 타지, 힘든 군 생활도 외롭지 않고 각자의 생활 속 큰 위안이었다.
제대할 때까지도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정말 기억에 남는 펜팔 친구이다.
아직도 여수 집 주소가 기억난다.
또 삼척 사는 친구는 공부를 잘하고 착했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답장은 써야 하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틈틈이 썼다고 했다. 또 문제집 출판사 이벤트로 나에게 문제집을 보내주는 학구파 친구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에 전념해야 해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대구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는 것이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인데 친구의 어머니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내 편지를 숨기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현재 내가 엄마 입장인데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마지막으로 부산에 사는 친구는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중식당 주방에서 요리를 배우는 친구였다. 매우 감성적인 친구지만 현실에 가장이 되어 고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런 착한 친구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칼과 불을 사용하는 험한 식당 주방에서 버틴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다.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감히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생일이 되면 돈을 벌기에 조금 부담스러운 선물을 보냈고 언제든지 부산에 놀러 오면 본인이 만든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했었다. 지금은 근사한 식당을 차리고 주방장이 되어 잘 살겠지?
이 시점에서 독자가 고개를 갸웃할 수 있는 생각을 추측해 보자면... 편지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나?? 란 궁금증이다.
그 당시 삐삐가 유행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추억이 돋는 삐삐!!
쉬는 시간 10분 동안 공중전화에 음성을 확인하느라 100미터 전력질주를 하던 친구들, 집 전화번호를 알았지만 굳이 연락을 하지 않았다. 몇 장의 편지로도 충분했다. 기다림이 필요한 편지가 불편했다면 처음부터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 사춘기 친구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아 옷을 사고 화장품도 사고 멋 내기 바빴지만 나는 용돈을 모아 예쁜 편지지와 펜, 스티커가 있는 팬시점을 가길 좋아했다. 또 생일이라도 되면 용돈을 더 빠듯하게 모아 소포도 보냈었다. 우표는 엄마 찬스를 써서 부담이 없었다.
그 당시 우리 엄마는 왜 나를 가만 두었을까? 시간과 돈을 쓰는데 어찌 잔소리 한 번 안 하시고 지켜보셨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지금 내 직장 옆이 큰 우체국이다. 아침마다 그 우체국 옆을 지나고 우체부 아저씨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그 3명의 친구들이 떠오른다.
내가 평범한 40대 중반, 아줌마로 결혼해 자식을 낳고 사니까 그 친구들도 그렇지 않을까?
답이 없는 질문을 던져보고 상상해 본다.
편지는 나에게 있어 느리지만 기다림이 설렘이었음을 알려주기도 하였고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내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는 과감함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펜팔 친구 상수와 규성이, 지덕이가 나를 기억할까? 하하하
같은 하늘 아래 건강하게 잘 살고 있길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