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몇 번의 연애를 했다. 그 당시의 나에게 있어 연애는 인생의 무척 중요한 부분이었다. 연애 중인지 아닌지 여자 친구와 관계가 좋은지 안 좋은지에 따라 내 자존감과 행복감은 요동쳤다. 당연히 내 마음을 받아 줄 것만 같았던 상대에게 차였을 때면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존재가 된 것 같았고, 당연히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은 상대와 연애에 성공했을 때면 자존감은 한없이 높아져만 갔다. 유치하게도 그땐 그랬다. 대학생이 거창한 취미도 없었고, 학업으로 인한 성취 역시 짜릿하긴 했지만 연애가 주는 행복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니 자연스럽게 예전의 기억들은 희미해졌다. 한 때는 모든 걸 공유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완벽한 타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신기한 건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면 연애 기간이 짧든 길든 그 추억들이 2시간짜리 영화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6개월 만에 헤어졌다고 해서 1시간짜리 단편영화처럼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3년을 사귀었다고 해서 24부작 드라마처럼 추억이 넘쳐흐르는 것도 아니다. 모두 다 딱 2시간짜리 영화 분량이다.
이제는 그 사람들과 연애를 했다는 생각이 안 들고 영화 한 편을 찍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녀 배우들이 영화를 찍으면서 감정이 생겨나 실제로 연애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프로답게 연기할 때의 감정과 실제의 감정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처럼, 그 사람과 나 역시 그 당시에는 연기를 했었던 것만 같다. 큐 사인이 떨어지면 연기에 몰입했다가 OK 사인이 떨어지면 바로 몸을 돌려 원래의 일상과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린 그렇게 연애라는 연기를 했다가 각자의 일상과 감정으로 돌아갔다.
서툴렀던 그 당시의 연애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은 가끔씩 불쑥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사람과 내가 그저 한 편의 영화를 찍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그 영화의 장르가 모두 멜로 인 건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도 있고 액션도 있고 호러도 있다는 사실.
만약 우연히 길거리에서 예전 여자 친구들을 만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예전에 느꼈던 설렘, 애틋함 등의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될까? 아니면 변해버린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완벽한 타인처럼 느끼게 될까? 신기하게도 (어쩌면 감사하게도) 단 한 번도 우연히 마주친 적은 없어 예전 그대로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자니?"처럼 구남친이 보낸다는 흔해 빠진 문자도 보낼 용기가 없어 우연히 마주치게 되길 기대한 적도 있다.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에서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면 서로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하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 다른 별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왠지 조금은 위안이 된다. 나의 지난 여배우들이여. 어느 별에 살고 있던지 부디 행복하길.
[이미지 출처: unsplash@Jakob Owe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