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작가의 책을 보니 참 생각이 많아보이더군요.”
쾌활하고 유쾌한 나를 드문드문 보는 사람들은 생각이 별로 없고 거침없는 인물로 보지만, 사실 잘못 본 겁니다. 외향성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걸 적당히 감추기 좋은 가면이지요. 왜 숨기냐고요. 생각이 많다는 건, 어떤 사안에 대해 왜와 어떻게를 끊임없이 생각만 하다가 미루거나 포기하고, 후회하고 주로 부정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들이 흔하죠. 나는 염세적이거나 패배주의자처럼 보여지기 싫었습니다. 그나마 나의 ‘비교적’ 긍정적인 태도는 생각이 많은 내가 빠지기 쉬운 부정적인 사고의 고리를 적당히 끊어주는 역할을 하는 선천적인 외향성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집니다. 아마도 글쓰기는 내 진짜 본 모습, 생각이 너무 많은 나의 발현이라는 또다른 생각이 들죠.
<더 좋은 곳으로 가자>의 저자 정문정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생각이 많다는 건 회사에 다닐 때는 본인의 단점이자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여겼지만, 이 자질이 작가로 일할 때는 장점이 되었다고요. 그녀에겐 글쓰기는 익숙한 것에 질문하는 일이고 궁금해야 하는 일인 동시에 일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의 오버씽킹에 빠지기 않기 위해 ‘왜’라는 물음에 대한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글쓰기는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요즘 쳇GPT 같은 게 인간의 일을 가져갈거라는 이야기가 많지만, 생각많은 이들에겐 크게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AI는 사고하지 않고, 데이터를 돌려 확률을 내고 일종의 계산할 뿐이죠. 우리가 생각을 하는 차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판단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생각이 많은 게 AI와 비교해서 대적할 수 없는 장점이 아닐런지요.
강준만의 <글쓰기가 뭐라고>를 두 번째 읽었을 때 무릎을 쳤던 게 떠오릅니다. 써야지 생각한다고요. 뭘 알아야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알게 된다고요. 저자는 파블로 피카소의 “그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단 알려면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에서 글쓰기를 적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중 쓸 게 없다고 글감이 부족하다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결국 생각할 게 없다는 것이죠. 내 생각없이 이 세상은 잘만 굴러가고 내 생각없이도 내 삶은 크게 문제없어보인다는 것은 둘 다 다 잘못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너무 많은 우리는 글쓰기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글을 쓰면서 쓸 생각이 많아지고 결국 쓰는 속도를 높여보기도 하고요. 물론 생각하기 그 자체는 고통입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고요. 허나 마냥 아프고 힘들까요? 알고 깨우쳐나가고 매만져가는 맛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픔 뒤에 성숙과 개운함도 분명 따라올 것입니다.
글을 쓰지 않았을 예전만 해도 짧은 시간을 두고 주기적으로 출간하는 작가들의 책을 덮어놓고 참 박했죠. ‘생각없는 글, 그 나물에 그 밥’라고 저평가를 했었답니다. 그런데 말이죠. 글을 쓴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그 나물에 그 밥 자체가 무지 어렵다는 걸요. 글이란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요원한 일인지를요. 그래서 이제는 함부로 남의 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가로이 그런 평가할 생각의 여유가 있다면, 그 시간에 글에 대한 내 생각부터 하는게 어떨까요. 넘치는 생각을 알뜰살뜰 주워담고 제대로된 마음을 곧추세우고 일어나게 하는 건, 바로 글쓰기 그래서 우리는 글을 써야 합니다. 써야 하고 말고요. 아무렴 그렇고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