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란 글로 적혀 있는 것을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옮겨 오는 행위가 아니라 ‘접어놓은 부채’를 펼치고 거기서 받아들인 것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것’ 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상상력이 핵심인 것”
정승연의 <세미나책>에서 공감했던 문구입니다. 난 책에 담긴 의미까지 꼭꼭 씹어먹지 않고 활자만 읽으며 뭉뚱그려 크게 의미를 캐치해 넘어가려고 하는 건 마치 우선순위를 모르는 조급증 앓이 같단 생각이 듭니다. 하려고 하는 말은 꾹 삼키고 읽으며 천천히 저자의 의도와 표현을 곱씹어보기 위해 들어가봅시다. 그렇다면 깨달음 곱절, 감동 두 배인걸 왜 몰라요.
물론 제대로 읽고 제대로 쓰려면 제대로 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질문의 영역과 내용을 잘 설정하고 저자가 글을 통해 직접적으로 답변하는 바로 그 내용도 물론 주목해야 하겠지만, 그 언저리에 진을 치고 있는 주변 정황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영형상수(影形相隨), 즉 그림자가 있는 곳에 실체는 반드시 따르는 법, 실상을 감싸고 있는 배경도 세밀히 봐야 합니다.
더 이상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한 386세대 걸출한 정치인들이 문득 떠오릅니다. 걸출한 올드보이의 갑작스러운 퇴장만으로도 충분히 귀감이 되었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학교 노조조차 미시적이고 생활 밀착형 이슈에 민감하고 정치적인 스텐스 자체를 멀리하는 현 시대에는 부동산 등 생활 정치를 원하는데 본인은 그에 부합한 인물이 아니기에 물러설 수 밖에 없는 당위성도 보태어 봅니다.
결국 그로 인해 민주화세대인 386이 몰두했던 거대담론의 시대는 현격하게 저물고, 지금은 세세한 현실정치에 몰입해야 하는 과업에 당면한 상황이란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헌데 어쩌면 시대도 시대였지만 그동안 폼나고 위대한 것에 가려 눈앞의 작은 것들은 하찮고 가벼운 것으로 인식하고 집중하지 않았는지,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성실함을 놓치진 않았는지 그 또한 생각해볼 일입니다.
우리의 쓰기도 같습니다. 부분은 전체의 의미를 돕는데, 디테일부터 진정 집중하고 보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진정한 집중이란 말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직접 그 대상이 되어보는 수준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핵심과 의도 파악을 위해선 ‘숲’이 아닌, ‘나무’부터 집중해야 합니다. 멀찌감치 떨어져 살핀 큰 덩어리의 형태로는 본 모습을 알 수 없죠. 단단하고 옹골찬 가지와 잎사귀 하나하나 그 속살까지 제대로 봐야지 더 넓은 문맥 속에서 다시 그 위치를 설정하고 결국 그 참된 의미를 읽어낼 줄 알게 됩니다.
물론 이를 위한 전제는 앞서 말한 '견디는 힘'입니다. 인내심마저 없다면 숨 꼴깍 거리며 쓰던 공책부터 성급하게 덮을 테니까. 분명 작은 것에 몰입할 줄 아는 깊고도 진득한 경험적 쓰기는 우리를 쑥쑥 키우는 물이고 햇빛이며 거름일 것입니다. 그래서 야무지게 쓰려면 뜬구름 잡는 허풍쟁이보단 디테일을 보는 쪼잔이가 되어도 좋단 이야기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에른스트 슈마허가 생각나는 짙은 가을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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