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가 물었습니다. “뾰쪽한 게 나아요? 둥글게 사는 게 나아요?” 뾰족한 것, 회사에 속한 나를 위해서건 조직을 위해서건 그건 마찬가지라 했습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조직이 요구하는 가장 핵심은 바로 문제해결능력인데, 뭉특한 시선으로 현안을 분석할 수도 풀어낼 수도 없으니, 일단 날이 서고 날카로워야지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강범규의 <라면집도 디자이너가 하면 다르다>에서는 빅타 파파넥의 “디자인은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상기하면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상당수의 문제들을 보다 쉽게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안목을 가져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완성도를 높이려면 결코 디테일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죠.
사람은 홀로 우뚝 존재할 수 없으며 무릇 조화를 이뤄야 하고, 디자인적 측면에서도 어울림은 물론 중요하지만, 기존의 것들을 연결을 하든 진짜 새로운 걸 발굴하든 그 무엇이든 날카로운 시선이 먼저입니다. 독서가들의 책들을 많이 접하고 있는데, 마쓰오카 세이코의 <독서의 신>에서 독서의 정의가 단연 독특합니다.
가벼운 옷 골라입는 일종의 패션이고 운하가 뚫리듯 하며, 납치당하고 싶단다. 어떻게 이런 희한한 표현을 쓸까 하고 보니 저자는 매일 밤 한 권씩 독서 감상문을 올리고 있는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무려 천권을 목표로 한 이 작업은 7권의 방대한 저술로도 출간했다고 하죠.
“독서는 조감력과 미시력이 교차하는 실험이다. 조감력은 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전체를 한눈으로 관찰하는 능력, 미시력은 작은 부분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관찰력인 것”
저자가 조망하는 미시력에 주목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독서는 덮어있는 미지의 세계를 조금씩 열어가는 행위이고, 열면 열수록 모르는 것이 튀어나와 그걸 찬찬히 보게 되고 알아가게 되면 적어도 오만의 덫에는 빠지지 않습니다. 문득 연상호의 <지옥>이 생각납니다. “온전한 세상은 작은 죄를 알아차리는데서 시작하는 겁니다. 언제나 자기 행동을 되돌아보는 자세, 모든 순간에 신의 시선을 인지하는 습관....” 여기서 신을 빼고 나를 넣어도 말은 됩니다.
온갖 내로남불이 인기처럼 흥행하는, 부끄러움도 사과할 줄 모르는 백치 아다다와 후안무치 끝을 달리고 있는 지금이 온전치 않는 세상인 지옥이 아니면 대체 뭐겠는지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쓰지 않고는 우리의 자유지만, 적어도 글을 다루며 나를 알고 세밀히 볼 줄 아는 미시력을 가지고 염치와 수치를 차분히 알아가도 되지 않을까요. 무릇 인간이라면 인간에 대한 도리와 예의를 지니면서 글을 쓰는 우리는 보다 뾰족하게 더욱 날카롭게 선이 살아있게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