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으로

초생

by 조각사

수원으로


시설관리직을 그만두고 전기 일을 찾았지만, 세상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았다. 일자리가 간절해질 무렵, 쉬고 있던 내 소식을 들은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 전기 자격증 있지 않아?”

그 한마디에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싶어 가슴이 뛰었다.

친구는 수원에서 함께 일했던 지인을 소개해 주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시원시원했다.

언제든 좋으니 당장 내일부터라도 출근하라는 말.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함께 쉬고 있던 또 다른 친구와 함께 낯선 타지, 수원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도착한 수원이었지만, ‘소개’라는 이름표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친구의 호의는 고마웠으나, 서툰 초보임에도 ‘누구 소개로 온 사람’이라는 기대치와 비교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지름길이라 믿었던 소개가 오히려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내 어깨를 눌렀다.

차라리 정공법으로 부딪혔다면 마음은 더 편했을까, 후회가 스치기도 했다.


수원에서의 첫 숙소는 아파트였다.

문제는 열 명도 넘는 인원이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리를 위한 방은 없었고 거실이 곧 방이었다.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는 이들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다행히 얼마 뒤 네 명이 쓰는 복층 원룸으로 옮기면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우리의 일터는 삼성 반도체 공장의 포설 현장이었다.

새벽 5시, 눈도 못 뜬 채 양치만 하고 안전화와 안전모, 안전고리를 챙겨 함바 식당으로 향한다.

아침을 든든히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식후에 피우는 담배 한 모금에는 오늘의 고단함에 대한 한숨이 섞여 나왔다.

신호등 앞에 서면 똑같은 장비를 착용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파란불을 기다린다.

그 광경은 흡사 군대의 거대한 행군을 방불케 했다.


현장 입구에서 보안 스티커를 붙이고 음주 측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일과가 시작된다. 전날의 술기운 때문에 발길을 돌리는 이들을 보며,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간절함과 책임감을 느꼈다.

입구에서 체조 장소까지, 다시 내부 현장까지는 족히 20분이 걸렸다.

무거운 장비를 차고 비상계단을 오르다 보면 온몸은 이미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다.

그 위에 방진복까지 껴입으니, 살갗을 파고드는 땀띠는 피할 수 없는 훈장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이름바 ‘포설’은 전선을 연결하는 일이다.

바닥을 기거나 아늑히 높은 천장에 매달려야 한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심각한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반면 내 친구는 리프트 자격증까지 따며 현장의 에이스로 거듭났다.

팀원들의 배려로 나는 주로 밑에서 심부름을 도맡았다.

최선을 다해 성실히 움직였지만, 화장실에서 우연히 들려오는 비교 섞인 뒷말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냈다.

하지만 심장을 터뜨릴 듯 압박하는 고소공포증 앞에서 나는 그저 무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분의 짧은 휴식 시간, 사람들은 방진복도 벗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핸드폰을 본다. 담배 한 대 피우러 가기엔 계단이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1시간 반은 생존을 위한 ‘타임어택’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밥을 해치우고 숙소로 달려가 40분이라도 눈을 붙여야 오후를 버틸 수 있었다.

길바닥 곳곳에 누워 쉬는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노숙자 같았으나, 그것은 모두가 한계에 다다라 있다는 치열한 증거이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보안 스티커를 붙이고 음주 측정을 한다.

먼지 덮인 비상계단을 줄지어 오르며 ‘오늘이 끝나긴 할까’ 하는 마음으로 오후 작업을 시작한다.

퇴근 30분 전, “오늘 잔업이다”라는 팀장의 목소리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친구와 맥주 한 잔 나누기로 했던 소박한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수원과 익산 등 여러 현장을 전전하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춘천으로 내려왔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나를 위해 “제가 2인분 할게요”, “찬현이가 제일 많이 뛰어다녀요”라며 너스레를 떨어주던 친구를 차마 두고 갈 수 없었다. 그에게서는 친구 이상의, 엄마 같은 든든한 향기가 났다.


최근 그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그때 정말 미안했다고 고백했다. 친구는 그제야 “사실 나도 그때 참 힘들었다”며 웃어 보였다.

밤새 이어진 대화 속에 내 마음의 무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물론 마음의 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꼭 해야 할 말이기에 내 속이 조금은 편해졌을 뿐.


결국 1년을 버티지 못한 채 그만두었지만,

당시의 나는 팀원들에게 피해가 된다는 심리적 압박이 극심했다.

내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은, 남에게 피해 주기 싫어하는 내 성격에 가장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참 오래 버텼노라고.


그만두던 날 회식 자리에서 들었던 마지막 말이 기억난다.

“전기는 고공 작업이 기본이라,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좋겠다.”

걱정과 상처가 공존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원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설 쪽에만 계속 있었다면 결코 몰랐을 나의 한계를 확인했으니까. 만약 그때 부딪혀보지 않았다면, 나는 나이를 먹어서도 고소공포증을 모른 채 막연한 후회 속에 살았을지도 모른다.

수원의 경험은 내 인생에 꼭 필요한 통과 의례였다.

그렇게 나는, 자격증만 가진 채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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