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데이트를 하며 2주 이상을 같이 보냈다. 아무런 싸움이나 갈등도 경험하지 못하고 잘 지냈다. 그런데 한국에 내가 방문해서 2주 정도 머무는 동안 우리는 4번 정도의 갈등을 경험했다.
1. 데이트 도중 아이들 옷사준 사건. 그녀는 내가 아이아빠라는 정체성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았다.
2. 식사도중 매운탕 국물 떠주지 않은 사건. 다른 남자들은 당연히 하는 건데 그걸 하지 않았다고 버럭 화를.
3. 공항에서 각자 택시를 타고 귀가한 사건. 집까지 바래다주길 바랐는데 내가 그냥 가 버린 사건.
4. 그녀를 배려해서 가족한테 인사를 가자고 제안했는데 배려는 자기가 해야 할 입장이고 나보고 주제파악 하라고 했던 사건.
미국에서 같이 지낼 때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갈등이 왜 한국에서 보내는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자주 발생했을까를 생각했다. 일단 그녀가 먼저 화를 내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좀 심했다고 사과하고 나도 이해해서 넘어갔다. 한국에서 여행 중인 나로서는 더 이상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기분이 나쁜 원인이 나의 배려가 부족함때문이라고 그녀는 생각하지만 나는 여기에 충분히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생각이 짧았던 부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정확한 분석이 아니다. 내가 배려가 부족한 남자라면 왜 이런 사건은 미국에서는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일까?
미국에서도 여러 번 쇼핑을 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고, 미국에서 여러 번 한국 식당을 갔어도 식사도중 나의 배려가 부족해서 그녀가 화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은 집이 하나이기에 택시를 타고 각자 헤어질 일은 없었다. 미국엔 내 가족이 없기에 가족한테 인사를 드릴 일도 없었다. 그렇다면 미국과 한국의 어떤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왜 한국에서 유난히 감정변화가 심했고 쉽게 기분이 나빠졌을까 하는 일이다. 미국은 그녀가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낯선 곳이기에 미국에서 여행하는 동안은 전적으로 나의 리드에 따라왔다. 베가스를 가고, 요세미티를 가고, Baseball Game, 바닷가, 골프연습 등등 여러 활동이 나의 예약과 계획아래서 진행되었다. 그녀는 잘 따라주었고 다행히 우리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체로 정 반대였다. 이게 큰 차이였을까?
그녀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 난 지금껏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 차는 보통 남자들이 다 운전해서 픽업하러 왔지 자기가 직접 한 적은 거의 없다. "너 차는 있니?"
- 난 돌싱이랑 사귀어본 적이 없고 내가 왜 이런 것까지 감당해야 하죠?
- 내가 왜 남자의 ex-wife얘기랑 애들 얘기를 매일 들어야 하죠?
이런 말의 뜻은 자신은 지금까지 남자들이 알아서 다 챙겨주었다는 뜻이고 자신은 미혼이고 나는 기혼이니까 미혼인 자신이 훨씬 우위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돌싱남자의 과거를 감당하는 게 힘들다는 뜻이다. 그녀는 아직도 연하 남자 친구와 사귀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처음에 이런 비판을 받았을 때 난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지난 결혼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새로 만나는 여자에게 기분 나쁜 발언이나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부분은 내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모습은 미국에서도 비슷했었다. 내가 한국에서 유난히 내 가족얘기를 많이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유난히 전과 같은 나의 모습이 그녀에게 더 bothering 하게 느껴졌냐는 것이다. 한국의 어떤 문화와 분위기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냐는 것이다. 혹자는 이쯤 되면 고민하지 말고 헤어져라고 조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궁금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환경 속의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는가를 이해하는 게 필요했다.
한국의 특징을 살펴보자.
-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
-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비율이 높아지는 나라
- 1인 일 가구 비중이 30%가 되는 나라
- 이혼율? 잘 모르지만 엄청 높은 나라
- 젊은 사람들이 돈이 없어 결혼 못하는 나라
- 먹고살기 힘들고 죽어라 일해도 집장만 하기 힘든 나라
대충 이 정도만 집어봐도 한국사회에 살게 되면 이런 환경이 나의 생각을 지배하게 된다. 결혼을 위해 수없이 많은 선을 볼 때도 스펙을 꼬박꼬박 따져야 하는 나라. 돈 많은 남자는 젊고 이쁜 여자를 만날 수 있지만 돈 없는 남자는 아무리 괜찮아도 안 되는 나라. 한국의 자본주의와 시장경쟁의 문화는 전 세계에서도 유일하고 독특하다. 극단을 치달리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실리콘 벨리는 미국 자본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이 동네 여자도 남자 돈 없으면 쉽게 결혼 안 한다. 하지만 미국사람들은 여전히 순진하다. 미국사람들도 여전히 돈을 중요시하지만 대놓고 돈부터 따지고 하지는 않는다. 남자 소개를 받을 때 한국처럼 스펙을 줄줄이 나열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소개팅이나 선문화는 심해도 너무 심하다. 학벌, 연봉, 키, 외모, 집안, 성격, 거기다 섹스까지 잘하는지 못하는지 확인해야 하는 나라다 (선섹후사). 여기에다 드라마나 TV광고를 통해서 본 연예인들을 보면서 눈이 높아진 사람들은 혼자 살지언정 자신보다 수준 떨어지는 사람이랑 결혼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한국문화를 비판하지만 한국 사람들을 본성을 좋아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주고받는 따뜻한 말들을 보면 한국은 아직도 인정이 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나라이다. 여기에 비하면 미국은 아주 개인주의적이고 "None of your business"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냉정한 나라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환경이 사람들을 너무 비인간적으로 몰고 가고 있는 듯하다. 이런 한국의 자본주의적 문화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에 숨어있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의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다. 한국에서 데이트를 하면 사귀는 남자와 과거에 사귀었던 남자가 실시간으로 빠르게 비교된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남자를 만날 때 사랑하니까 포용하고 이해하려는 생각보다는 내 가치에 비해서 이 남자가 만날 가치가 있나라는 비교의 생각이 항상 머리에서 돌아간다.
그녀가 한국에서 유난히 기분이 나빴던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자기가 경험했던 남자들과 나를 비교하고 자신의 높은 가치를 생각하면 나는 자격이 한참 떨어지는 상품이 된다. 나 말고도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텐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 남자를 만나지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연애결혼의 가장 큰 단점은 기회비용이다. 내가 한 사람을 선택할 때 미래에 더 좋을 수 있는 어떤 사람을 포기하게 되는 비용이다. 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계속하며 미래에 있을 더 좋은 기회를 위해 현재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다. 중매결혼의 시대에는 이런 선택 자체가 없었다. 그때는 낭만은 덜 했겠지만 결혼은 더 잘 이루어졌다. 오늘날은 낭만과 연애는 쉽지만 결혼은 엄청 힘든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한국에서 그녀는 본인도 모르게 빠져있는 여러 가지 안 좋은 자본주의문화의 시장경제의 영향 때문에 남자를 만나면서도 바쁘게 계산기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계산의 끝에 남는 것은 외로움과 자존심뿐임을 그녀도 잘 알고 있지만 환경이 끌어당기는 중력의 힘은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외로운 두 남녀가 인생의 후반전을 같이 보내는데 우리는 고려해야 하는 게 너무 많다. 그래서 차라리 혼자되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난 혼자되기를 거부한다. 책을 읽고 생각하기 위해서 혼자되기를 선택하지만 남은 인생을 혼자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싫어서가 아니라 난 삶에 대한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힘들더라도 계속 시도하는 이유는 그만큼 관계에서 얻어지는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건을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내 노력도 앞으로의 삶을 힘차게 살려는 내 의지이다.
그녀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저는 곧바로 알아차리고 자신도 모르게 냉정하게 쏘아붙이는 경향이 있어요." 아마도 눈치 빠른 여자의 직감인 듯하다. 눈치 없는 여자보다 훨씬 좋다. 이 남자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지 안 하는지 대화와 작은 제스처에서도 쉽게 간파할 수 있다는 건 특별한 감각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난 왜 그녀에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행동을 더 많이 하게 되었는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약간의 행동 변화를 만들었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걸 간파한 게 아닌가? 그래서 난 내 자신의 생각을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양심에 찔리는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다. 미국에 있을 땐 거의 24시 내내 그녀만 바라본다. 다른 여자를 상상할 기회조차 없다. 식당을 가거나 여행을 같이 해도 옆의 사람들을 거의 신경 쓰지 않는 문화이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공항에서 내리면서부터 수많은 여자들이 내 눈앞을 지나간다. 한국엔 왜 이렇게 젊고 이쁜 여자들이 많은가? 피부는 다들 연예인 같고 일하는 직원들은 다들 어리다. 젊고 이쁜 여자들을 계속 쳐다보는 건 민망한 일이라 일부러 눈길을 피하려 하지만 나의 무의식은 이미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차곡차곡 스쳐가는 여자들을 무의식 속에 쌓아놓다 보면 내가 그녀를 볼 때 무심코 나도 모르게 비교의식이 발동한다. 내가 한국에 오면 그녀보다 더 젊고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정도 조건이면 좋다고 따라오는 여자가 있을 것 같은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데이트 시장에서 여자를 쇼핑하는 상상을하게 된다. 이런 나의 무의식이 사소한 말투나 제스처로 드러나게 되고 이런 남자의 행동에 예민한 그녀는 이를 눈치채고 나에게 쌀쌀맞은 태도로 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즉 그녀의 이런 냉담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한 원인이 그녀한테 있는 게 아니라 나한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혼 후 많은 여자를 사귀어 보지 않고 그녀에게 commitment 했다. 원래 early commitment 하는 게 나의 스타일이기도 하고 성격이 급하기도 하다. 그래서 다른 여자를 더 알아보지 않고 한 여자를 선택한 나의 결정에 항상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이런 나를 괜찮다고 다독였다. 좋은 결정은 많은 후보를 골라본다음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결정 후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라고. 쇼핑을 할 때도 처음 맘에 드는 옷을 그냥 사는 편이다. 그리고 좀 아쉬워도 자족하며 10년을 잘 입고 산다. 사람의 선택을 쇼핑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선택의 방식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난 그녀를 선택했고 이후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확신이 한국에 가서 많은 여자들을 보면 흔들린다. 내가 고려해 보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의 후보들이 오히려 더 좋은 선택이 아닐까라고 나의 생각을 흔든다.
인간은 자신의 손안에 든 사과보다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과가 더 맛있게 보이기 마련이다. 특히 남이 들고 있는 사과는 왠지 더 맛있어 보인다. 하지만 일단 사과를 먹어보면 이 사과나 저 사과나 마찬가지로 같은 사과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우리의 생각(의식)을 흐리게 한다. 이런 혼란 속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의 선택을 믿고 지키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자기 객관화와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정신분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스스로를 한국처럼 다양한 선택이 존재하는 상황 속으로 집어넣지 않을 필요가 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시골 마을에 사는 갑돌이에게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갑순이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다. 한국엔 식당도 많고 편의점도 많고 사람도 많다. 모든 게 너무 많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자유연애를 통해서 선택한다는 것은 포기해야 할 높은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언제나 쉽지 않은 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