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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하 Mar 29. 2024

예술은 고독에 대한 자기 방어적 표현이다

철학적 에세이를 쓰는데 가장 힘든 점은 글을 읽는 사람의 비판을 염두에 두고 쓰는 데 있다. 쓰면서 자기 검열이 이루어지면 생각을 쏟아낼 수가 없다. 써놓고 나서도 공개하지 못하는 글이 돼버린다. 나는 비판이 없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글을 쓰려는 게 아니다. 그저 나의 생각을 내가 정리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할 뿐이다. 노자도덕경(41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하사문도 대소지 불소 부족이위도

남들이 비웃지 않는 다며 도가 되기 부족하다는 뜻이다. 누군가 뭔가를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진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반대와 비판의 소리가 크다는 점을 강조한 듯하다. 난 그저 욕먹을 각오를 하고 내 생각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쏟아냈을 뿐이다. 예술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나 또한 문학과 음악을 사랑한다. 혹시라도 내 글에 offend 당할 분들이 계시다면 그건 내 의도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정신적인 사랑, 관념적인 사랑은 아름다운 시로 표현되곤 한다. 특히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사랑했으나 헤어지게 되는 사랑, 이런 사랑은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더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되고 문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반대로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이 다 잘 이루어지는 경우는 물론 문학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 대신 사랑의 경험을 즐기고 행복해하며 문학적 표현 없이 현실적인 삶을 살게 된다. 즉 시나 이야기라는 상징적인 문학형태로 표현될 필요 없이 직접 삶에서 기쁨으로 표현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의 사랑에 만족하며 사는 경우 이들은 책상에 앉아서 시를 쓰는 대신, 같이 여행을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삶을 즐기는 행동을 할 것이다. 인간이 사랑을 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시나 음악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삶 자체에 생명력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고 살기 위함이다. 결국 중요한 건 삶이지 아름다운 시나 문학이 아니다.


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삶과 사랑에 대해서 지혜로운 잠언들을 남겼지만 정작 그들의 삶은 외로웠다. Plato, Descarte, Spinoza, Schopenhauer, Nietzsche 이들은 대부분의 삶을 혼자 살았다.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키며 철학적 사유를 통해 엄청난 글들을 남겼다. 니체의 경우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게 된 후 오히려 많은 작품활동을 했다. 사랑의 아픔이 철학으로 표현된 셈이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서 이상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평생을 산다. 이들은 외롭고 고독하다. 하지만 이를 대체할 여러 가지 대안들이 있다. 일을 열심히 한다든지, 돈을 많이 번다든지, 심지어 예술에 모든 열정을 쏟는다든지, 이 모두 긍정적인 삶의 노력이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인간의 빈 공간을 채울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 빈 공간을 신적인 사랑으로 채운다. 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더 완벽하다. 그 이유는 신에 대한 사랑은 주로 관념적이고 신비주의적 이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주관적 경험이다.


종교나 신앙이 없는 사람도 신에 대한 사랑과 유사한 절대적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 사랑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예를 들어 과거 젊은 날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리며 상상 속에서 그 사랑의 순수함을 과장하고 그때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주입시킨다. 이렇게 이상화된 과거의 사랑은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일상의 삶에 영향을 끼치듯 그 사람의 일상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살아가며 가지게 되는 이성과의 관계가 실패할 때 던가 아니면 혼자 살아가며 외로움을 느낄 때면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사랑은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언젠가는 그런 사랑이 다시 찾아올 거야, "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으로 타협할 수는 없어." 그에게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의 기준은 과거에 머물러있고 자신의 상상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불완전하고 상처 투성이의 사랑은 자신이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고 거부하게 된다. 과거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다.


자신의 이상적 사랑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고, 육체적 정욕에 이끌리거나, 물질적 유혹에 이끌려서 진행되는 관계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머릿속에 이런 이상을 품고 사는 사람은 때론 현실 속에서 삶을 위해 선택하는 현실적인 결정을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비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혼한 여성이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친절한 한 남자와 재혼을 선택했을 경우 이런 선택을 사랑을 저버린 현실적인 타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재혼의 경우 우리가 진정한 사랑에 의한 결혼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으나, 외로운 남녀가, 삶의 무게에 지쳐있는 한쌍의 남녀가, 밤마다 외로움에 괴로워하는 외로운 사람들이, 같이 살기로 결정하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니 아니니 하는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이상적 사랑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삶을 위한 선택이냐 아니냐 하는 데 있다. 중요한 건 천국에서의 삶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인 것처럼, 사람과의 만남도 내가 처한 현실적 상황에 그리고 인생의 특정 시점에 삶을 위한 결정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상적인 사람의 단점은 너무 이상에 집착한다는 데 있다. 젊은 때 Ideal을 추구하는 건 젊음의 특권일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이 이상적으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한 나이에는 오히려 이상이 내 삶을 더 외롭고 힘들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죽더라고 끝까지 이상적 사랑을 붙들고 숭고하게 살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사랑에 만족하고 괜찮은 사람을 선택해 나머지 삶을 같이 살 것인가? 나도 이상주의자로서 이상적 사랑을 갈망하고 살았지만 이젠 현실적인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성인이 아니고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삶을 고통이라고 보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하나는 무욕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을 위한 삶이라고 보았다. 생각해 보면 젊었을 때 시인이 되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분명 그때의 나는 시를 정말 사랑했다기보다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시적표현이 위안이 되고 시가 내 고통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설명해 주는 도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유행가가 이별을 노래하고 있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청소년기에는 특히 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현실에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생각이 많은 시기이다. 그래서 이때는 문학을 사랑하고 음악을 좋아한다. 즉 예술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방어기제적 표현인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혼자 외롭게 살면서 좋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이유도 같은 이유이다.


고독한 방랑자의 삶을 살았던 니체도 처음에는 고독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외로움을 극복하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고독 속에서 자신의 많은 사상들을 글로 표현해 냈다. 하지만 처음에 그가 원했던 것은 고독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와 같이 사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의 바람은 거절되고 계속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그는 결국 혼자 살게 된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강한 삶에 대한 의지로 고독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만약 살로메와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계속 고독 속에서 초인사상을 생각하며 글을 썼을까? 그랬다면 인류는 아마도 니체의 철학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류에게는 다행이요 본인에게는 불행한 삶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외로운 인생을 살면서 철학이나 아름다운 예술을 생각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라도 만나서 사랑을 하며 살 것인가 이것이 고민이다. 인간의 강한 정신력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극복하고 창조적인 예술활동을 할 수 도 있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은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런 삶을 선택하고 싶지 않다. 소박하고 평범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만나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살고 싶다. 고독을 즐길만한 강한 정신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삶을 강한 정신력으로 버텨내고 싶지 않아서다. 할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은 삶을 선택해야 한다. 어떤 이유로도 고독한 삶이 사랑하는 삶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 우리가 고독을 미화하는 건 고독이 주는 여러 가지 장점 때문이고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함이지 고독 자체가 바람직한 삶의 방향은 아니다. 갑자기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가 생각이 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삶은 그저 통속하거늘 우리는 여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인생의 허무함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통속(secular)하다는 것은 삶이 인간의 본능에 좀 더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모든 이상주의는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으려고 한다. 외로운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길 원한다. 가족이 되었든 연인이 되었던 교회공동체가 되었든 타인과 어울리고 소속감을 느낄 때 평안을 느끼는 게 본능이다.  요즘도 좋아하는 시집을 꺼내 읽고 밑줄을 긋고 감탄하곤 한다. 시간 날 때마다 기타를 연습하고 유튜브에 내가 만든 음악을 올리고 흐뭇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기쁨들이 나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외로운 존재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예술로서 해결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무리 좋은 글을 읽고 쓰고 기쁨을 느껴도 혼자 사는 외로움 삶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삶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 오직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은 그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도 아니요 예술도 아닌 나와 똑같은 몸을 지닌 다른 존재에 의해서만 인간의 외로움은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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