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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하 Mar 15. 2024

그녀와 헤어지게 된 이유

먼저 그녀의 장점과 좋은 이유를 생각해 보자. 20대(1988) 좋아했던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 음악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학 방송국에 다니던 그녀는 많은 종류의 음악을 듣는 음악에 수준이 높은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영화음악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그녀의 이런 취향이 영화에 대한 나의 낭만적 감정과 어우러져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왠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좋아할 것 같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음악도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학교 캠퍼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그녀를 상상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때의 기쁨과 설렘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때의 기억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과거의 느낌을 현재에 적용하고 싶은 내 심리적 작용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좋아했던 이유는 그녀가 아웃사이더라는 느낌이 나의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학교 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모습이 나와 닮아 있었다. 만나서 얘기해 보면 왠지 생각이 깊고 똑똑한 여자일 것 같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 보통 여자들과 다르고 통속적이지 않은 독특함이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그녀를 좋아한 이유이다. 사랑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만남에 자신의 인생을 내 던질 수 있는 모험심 있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고 나는 상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를 사귀려고 하는 나의 모습이 또한 나를 그 소설 속 이야기의 상대인물로 만들고 있었다. 당시 읽었던 이문열의 소설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럼 나는 쌀쌀맛은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인물이었다. 그것 만으로도 나의 짝사랑은 의미가 있었다. 소설이 현실이 되리라는 기대감과 설령 이루어지지 않는 다 하더라도 여전히 소설의 한 인물로 대학생활을 한다는 건 나에겐 큰 의미가 있었다.


과거에 좋아했던 이유 말고 현재에(2023) 좋아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녀를 미국에서 우연히 만난 건 우연이기보단 확률적으로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대학 때 좋아했던 여자를 미국에서 그것도 같은 동네에서 만나다니. 대학동창 한 명 없는 나에게 우연히 만난 동창이 그때 그 여자라니.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나 보다. 우선 그녀는 나랑 공유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좋았다. 동갑이니까 말도 친구처럼 편하게 놓을 수 있었고, 대학 얘기 80년대 90년대 유행가랑 팝송을 같이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미국생활 25년 만에 처음 느끼는 반가움이었다. 그녀는 21살 때 덕수궁 옆 세실 극장에서 같이 김광석 공연을 본 여자였다. 자리가 없어서 앞줄에 쪼그리고 앉아서 김광석의 공연을 봤던 기억이 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였고 현재 그녀를 좋아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남편과 오랫동안 별거 생활을 한 상황이 이제 막 별거를 시작한 나와 너무 동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내 결혼생활 이야기 들려주고 그녀는 불행했던 지난 결혼생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왠지 그녀의 불행이 안쓰럽게 느껴지면서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했다. 미국에 그녀처럼 많은 걸 편하게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사실 하나 만으로도 그녀는 나에게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존재이다.


같이 골프를 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단시간 내에 빨리 가까워지게 했다. 매주 금요일 가까운 근교로 골프 여행을 떠나고 주중에 연습하기 위해 한번 더 만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꿈 중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골프 여행을 같이 가는 것이었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갖고 있는 로망이다. 같이 라운딩을 끝내고 같이 식사와 술 한잔을 곁들이고 밤에는 같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고 아침에 모닝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난 그녀의 골프 여행 동반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 그 일을 저지르고 싶었다. 도덕적으로 괜찮은 일인지는 아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54세 이혼한 중년 남자에게 도덕이라는 억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자제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호텔과 골프장을 예약했지만 그녀는 그런 모험을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예약은 취소했다. 난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여행을 같이 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나중에 헤어지게 되더라도 한 번이라도 꿈에 그리던 그런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인생에서 자주 오지 않는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이 이런 기회를 놓치고 사는가? 망설이다가 포기하는 그런 습관이 우리의 삶을 죽어사는 삶으로 만든다. 러셀이 "결혼과 도덕"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을 두려워하는 사람이고 삶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녀와 고급식당에서 와인을 마시며 저녁을 같이 먹을 때 느꼈던 기분은 20여 년의 결혼 생활이 지난 후 처음 느끼는 설레는 데이트였다. 젊었을 땐 데이트하는 걸 얼마나 좋아했었던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그 설렘은 나를 다시 살아나게 만든다. 몸과 마음과 감정 모두 젊어진다. 생각이 빨라지고 말은 시인처럼 사랑의 언어를 던져낸다. 우리는 두 번 정도 이런 디너를 같이 했다. 하지만 이후 같이 자지는 않았다. 이게 아쉬운 부분이다. 결혼하기 전 싱글 때 만나던 여자들이 다 이런 식이었다. 서로 결혼할 맘도 있고 당시 상황에선 둘 다 결혼 적령기이고 성숙한 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데이트 이후 성관계는 하지 않는 이런 한국의 보수적인 성문화가 맘에 들지 않았다. 여자들 입장에서 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성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행한 세대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서양영화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잠자리.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continental breakfast를 준비하는 남자 주인공. 현실 속에선 여전히 이런 장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녀는 미국에 살면서도 전통적인 한국문화와 보수적인 성도덕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았다. 골프 여행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같이 자면서 사랑을 나누었다면 지금쯤 우리의 관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또 한 번 우리는 인생에서 꿈처럼 살 수 있는 기회를 도덕과 관습이라는 이유로 놓쳐 버렸다. 이처럼 우리는 도덕과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나의 빈집에 와서 두 번이나 저녁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셨다. 두 번째 방문은 아예 섹스를 할 의도를 가지고 비 오는 날 골프장에서 직접 우리 집으로 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은 골프를 치면서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끝나고 나서 내가 사과하고 그녀도 맥주 2잔을 마시면서 많이 풀어졌다. 돌아오려고 운전을 시작하려 할 때 그녀가 갑자기 자기한테 키스를 하라는 것이었다. 황당한 반응이었다. 난 키스를 했고 그 자리에서 섹스를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난 서둘러 위험한 빗속을 뚫고 나의 집으로 그녀를 데려 왔지만 술이 다 깬 그녀는 갑자기 맘이 바뀌어서 나중에 호텔에서 제대로 하자는 제안을 하며 거절했다. 이미 나의 몸은 달아오를 때로 달아올랐는데 나중으로 미룬다는 건 내 맘 보다 내 몸이 너무 힘든 결정이었다. 남자에게 한번 달아 오른 정액은 발산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다. 이런 남자의 몸을 그녀가 이해할리가 없었다. 그날 저녁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혼자 자위로 하루 종일 쏟아져 나오려고 했던 남자의 액체를 쏟아냈다. 참으로 비참한 기분이었다. 꼭 이렇게 해야만 했었나? 내가 뭘 잘못했나? 그냥 주저하는 그녀를 더 밀어붙여서 했어야 했나? 그래도 친구사이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런 짓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했나? 이런저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빨리 스쳐 지나갔다.


러셀의 결혼과 도덕이라는 책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내용이 깊은 책이었다. 내가 읽은 러셀의 책중 가장 자세하게 읽은 책이다. 우선 그는 섹스라는 주제를 적나라하게 파해쳤다. 대분분의 지식인들이 하기 부끄러워하는 이야기를 아주 지적으로 심리적으로 분석하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지금까지 이런 책이 있었을까? 아니 난 지금껏 뭘 하다가 이 책을 나이 50이 넘어서야 읽게 됐을까? 이 책의 중간에 러셀이 자신의 저술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자신도 이런 주제에 대해 책을 쓴다는 게 큰 비난의 우려를 받는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거의 100년 전에 이 책을 쓴 이유는 결혼과 도덕이라는 주제가 너무 중요한 주제 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도덕에 관한 잘못된 교육과 그로 인한 잘못된 인식이 오늘날까지 우리의 결혼생활과 연애관계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오랫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같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좋은 시간을 여러 번 같이 보내고 나서도 한 번도 섹스를 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됐다. 성적으로 좀 더 자유 분방한 유럽인들이나 미국사람 같았으면 어떠했을까? 그녀는 미국에 살면서도 여전히 한국의 80년대를 살고 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그동안 섹스를 거의 해보지 못하고 자신의 젊음을 다 낭비하며 살아왔어도 그녀에게 순결과 정조라는 개념이 그녀의 삶을 지배한다. 그녀의 생각은 이렇다. 섹스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해야만 하는 것. 사랑이 없는 섹스는 저속한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평생 혼자 산다 하더라도 섹스를 해서는 안 되는 것. 얼핏 생각하면 도덕적이고 정당성이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도덕적 판단을 옳으냐 그르냐를 평가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건 다들 동의하는 일이다. 하지만 사랑 없는 섹스는 저속하다는 것도 다들 동의하는 보편적 가치인가? 인류 역사 이래 사랑 없이 섹스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성욕은 식욕처럼 생물학적 필요에 의해 발생하는 욕구이다. 이 생물학적 욕구에 정서적인 욕구인 사랑을 조건으로 결부시켜서 본능적인 욕구를 억제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겠는가? 이 부분이 러셀이 주장하는 부분이다.


그녀의 뛰어난 지적능력은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억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억제가 도덕적 정당성을 지닌 결정이라고 쉽게 합리화시킨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열정을 미래에 있을 법한 이상적인 사랑에 집중하게 한다. 이런 똑똑한 사람의 특징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욕망을 미래에 발생가능한 추상적인 생각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에 이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현실의 고통을 참고 견뎌 낼 수 있다.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Defensive Mechanism)이다. 그녀가 카톡으로 남긴 말을 다시 생각해 보자. "관계(섹스)를 위한 관계라니 내 평생 살아온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관계를 위한 관계란 뜻은 섹스를 위한 섹스, 즉 사랑 없이 하는 섹스를 뜻하고, 평생 살아온 자존심이란 뜻은 어릴 때부터 형성된 자신의 신념(Belief or Conviction)을 뜻한다. 여기서 신념이라는 것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과 자라온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생각의 틀(Frame)을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여러 종류의 신념을 가지고 있고 신념의 특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녀의 평생 지켜온 성도덕에 대한 신념에 따르면 사랑 없는 섹스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는 아주 저속한 행위 이기 때문에, 자신의 본능적 욕망에 굴복해서 그런 섹스를 한다는 건 그녀의 신념에 비추어 봤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은 자신의 본능적 욕망보다는 평생을 지켜온 신념이었다. 왠지 본능은 동물적이고 신념은 고상한 행위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술이 약간 취해 있을 때는 이 본능이 강하게 고게를 쳐들지만 술이 깨면 그녀의 강한 이성이 자신의 본능을 다시 감옥 안에 가두어 버린다. 이 처럼 그녀의 몸은 스스로의 감옥에 갇힌 체 50여 년을 살아왔다.

물론 이건 그녀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한 인간의 선택을 다른 사람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판단의 근거가 된 신념이 옳은 생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념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잘못된 신념하나가 평생을 불행 속에 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난 왜 그녀와 헤어지게 됐을까? 그녀의 마지막 문자는 윗글과 더불어 이렇게 끝이 났다. "앞으로  친구가 되던지 그도 힘들면 안 만나는 것이 좋겠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헤어질 때 문자로 한다더니 내가 그 꼴을 당하게 될 줄이야. 문자로 중요한 글을 남길 때 문제점은 남기는 사람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게 또 문자의 특징이다. 앞으로 만나지 말자는 건지 그냥 친구로 지내자는 건지 내가 해석하기 나름이다. 다시 문자를 보내서 의중을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마치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극장을 나온 것처럼 난 그 카톡에 답장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아니 정리는 그녀가 먼저 했다. 난 그저 무언으로 그걸 받아들였다.


내가 그동안 그녀에게 보여준 내 성의와 애정은 이런 대접을 받을 정도가 아니었다. I don't deserve this kind of treatment. 나와 섹스를 하는 행위가 자신 평생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정도의 형편없는 일이란 말인가? 마치 신데렐라가 왕자대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건 그녀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문자 하나로 나를 feeling terrible 하게 만들었다. 두 달 정도 지속됐던 그녀와의 짧은 연애는 실패한 섹스와 문자 한 통으로 끝이 났다. 아마 문자가 아니었으면 우린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할 수 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미 너무 커져버린 Ego 때문인 듯하다.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우린 쉽게 용서가 안 되는 무언가를 가지고 산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이혼하게 된 듯하다. 그리고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는 게 힘든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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