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잊혀진 고독(孤獨)

잊혀진 고독

by 할매

키가 큰 백인 남성의 뒷모습이 보인다. 웨이브 진 연갈색 머리칼이 등줄기로 흘러내려 찰랑거리고 있다.

풍성한 머리칼은 미풍에 하늘거린다. 머리엔 중절모 비슷한 멋진 모자를 쓰고 있다. 정장 차림이다.

깔끔한 구두를 신고 있고 큼지막한 여행 가방을 왼손에 들고 있다. 오른쪽을 향한 옆 얼굴을 보니 남편이다.

남편은 왼쪽의 여자와 손을 맞잡고 있다. 서로 마주보며 미소짓는다.


오른편에 있던 화려한 차림의 여자 역시 작은 여행용 가방을 오른손에 들고 있다. 직감은 그녀가 우리 작업실 직원임을 알아 챈다. 둘은 걸어가며 미소짓고 있다. 다정함이 둘의 뒷모습에 짙게 배어 있다.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보고 있다. 가벼운 분노가 치민다. 아니, 허탈감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고독인지도...


나는 벽 안쪽으로 들어간다. 작업장 탁자에 두 남성이 일하고 있다. 그들은 내가 들어가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내 존재 자체를 모르는 듯 하다. 나는 순간 허탈감이 몰려든다. 아니 어쩌면 고독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열쇠 꾸러미가 손에 잡힌다. 순간 나는 꾸러미를 바닥에 냅다 던진다.

나무 문짝 비슷한 게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먼지가 잔뜩 덮여 있다. 열쇠 꾸러미는 그 문짝 위에 풀썩 떨어진다. 주위가 온통 희뿌옇다. 나는 벽으로 다가가 통유리창을 밀어 연다. 잔디 위로 다정히 걸어가던 두사람의 뒷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멍하니 둘이 사라진 그 자리를 바라 본다. 꿈이다. 고독에 파르르 떨며 슬며시 눈이 떠진다.


옆에 누군가 있다. 고개 돌려 보니 남편이다. 참으로 오랫만에 늦잠을 자는 구렛나루 수염의 남편이다. 남편은 모로 누워 자고 있다. 익숙한 그 모습에 안도감이 몰려 온다. 조용히 바라보고 있자 남편이 몸을 뒤척인다. 서서히 잠이 깨는지 남편 역시 나를 바라본다. 커다란 눈이다. 큰 눈의 사나이는 갑자기 다가와 나를 덥석 껴안는다. 남편의 체취와 체온이 동시에 느껴진다. 꿈 속의 고독이 사르르 사라진다. 하지만 어떤 고독은 아직도 뇌리를 맴돈다.


프랑스의 복싱 영웅 마르셀 세르당과 이혼한 아내의 고독이다. 홀로 남겨진 고독. 그녀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재혼 여부도 모른다. 깡그리 잊혀 졌다. 그녀의 진한 고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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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회색 안개다. 시간이 흐르며 농도가 짙어진다. 주위가 온통 뿌옇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소리는 들리되 홀로 있다. 오롯이 혼자다. 고독(孤獨)이다. 외로울 고, 홀로 독.

우리 주변엔 그런 고독 속에 잠겨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나도 그런 고독을 맛 본 적이 있다.


홀로 외로운 잊혀진 고독은 타인에게서만 잊혀진 고독이다. 심연 깊숙히 가라앉을 뿐이다. 나는 꿈 속에서 그녀의 고독을 보았다. 잊혀지지 않는 그녀의 진한 고독을...


그대 오늘 외로운가? 고독한가?


안개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물질(物質)이요 현상물(現象物)이다.

고독은 감정(感情)이다.

감정 역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공(空)이다.


물질(物質) - 물건의 본바탕. 정신에 대하여 인간의 의식에 반영하며 의식에서 독립하여 외재하는 객관적 실재.

감정(感情) - 사물에 느끼어 일어나는 심정

현상(現象) - 관찰할 수 있는 사물의 형상.

공(空) - 속이 텅 빈 것. 불변의 실체가 없는 것.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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