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알려졌다
우리 부부가 매스컴에 첫 등장한 건 2005년이다. 그때는 울 산적이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용하던 때였다. 자료 관리는 서버 업체가 했었다. 소소한 일상 생활이나 집 짓는 과정, 산골의 이모저모를 주로 소개했다. 산적은 글 쓰기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내 전용 게시판을 만들어 주었다. 직접 올리는 권한도 부여해 주었다.
시골에서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시골살이의 일은 참으로 다사다난하다. 돈이 많아 허드렛일을 누군가에게 시킨다면야 정말 여류롭고 우아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온갖 것을 직접 몸으로 때워야 한다. 쉴 새 없이.
나 역시 그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구장창 일했다. 로봇은 방전되면 멈춘다. 하지만 인간의 신체는 방전되도 버틴다. 저녁 때 산적과 혹은 지인들과 한잔 술에 얼큰해지면 나는 바로 곯아 떨어졌다. 나는 초저녁 잠이 많다. 자다가 밤중에 깬다. 그러면 가만히 일어나 글을 썼다. 그리곤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런데, 그 글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월간지, '전라도닷컴' 편집국장님이셨다. 어느날 미리 양해를 구하고 우리집을 방문하셨다. 그분은 내게 말했다. "글을 거침없이 쓰시길래 만나보고 싶었다" 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후, 산적의 산골살이 이야기가 두세 페이지에 걸쳐 잡지에 실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방송매체에서 연락이 왔다. 출연 섭외였다. 처음인지라 별 생각없이 응했다. 그게 '사노라면' 프로였다.
그 프로가 방영되고 해가 바뀌어 2006년이 되었다. 5부작, '인간극장'에서 섭외가 들어왔다. 그땐 우리 딸이 수도권을 떠나 집으로 내려와 대학을 다니던 때였다. 농장도 조그만 필지(약 800여평)를 사들여 가꾼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농장 위쪽의 자그만 필지에는 토종닭도 얼마간 키울 때였다. 지인의 권유로 군(郡)의 지원을 받아 본채를 개조하여 민박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나대로 동복댐 지역 수변구역 지정을 위해 면사무소에 아르바이트로 일했다. 그 후 사무 보조직 정식 고용원이 되었다. (동복댐 준공은 1971년이다. 상수원 보호구역 지정은 1973년 5월이다. 정부는 상수원 보호를 위해 추후 수변구역을 지정 고시했다. 낙동강과 영산강 구역 지정은 2002년이다. 동복댐 지류인 섬진강도 아마 그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수변구역 지정은 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재산권 침해를 보상하기 위해 댐 상수원 보호 구역 밖의 500m 이내에 들어가는 전답과 주택 소유자에게 적정한 돈을 지급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그러려면 우선 실사를 거쳐야 했다. 지도를 보고 구역 내에 들어가는지 여부를 정확히 체크해야 했다. 내가 했던 2004,5년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대학 재학생이던 남학생과 한조가 되어 일했다)
한편 우린 민박 시작하여 본채를 손님에게 내주다보니 불편한 점이 많았다. 우연히 개울 건너에 조그만 필지 두개(높낮이가 다른 80여평과 40평 짜리 대지)를 사 놓았던 터였다. 산적은 그 터에 민박으로 활용하기 위해 원룸형 목재 한옥 두채를 2,3년에 걸쳐 혼자 손수 지었다. 내부적으로 덜 완성 되었지만 민박(그 때 민박은
신고제 였다가 후에 허가제로 바뀌었다)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저러한 여타 환경에서 우리 가족 세명 모두 출연한 프로가 인간극장이었다.
꼬박 3주간 촬영했다. 찍은 량이 너무 많아 필름 130개가 웃돌았다. 산적은 우스갯 소리로 5부작이 아니라 10부작으로 방영하는 게 어떠냐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인간극장은 평균적으로 필름 70개 분량을 찍는다고 한다)
인간극장 본방은 하루 한편 방영이 기본이다. 그땐 우리집에 ISDN 전화기가 있었다. 드디어 방영이 되던 날,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