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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모 Sep 21. 2022

본능과 버릇 사이 2

그러나 노인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노인의 가느다란 눈에 약간의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시,  감미로운 꿈을 꾸듯 여자를 쳐다보며 거침없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두 사람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열에 들떠 이야기하는 노인을 남겨두고 여자는 그 자리를 떠났다. 헛구역질을 참으며 걷던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후로도 여자는 산책길에서 가끔 노인을 볼 때마다 정색을 하며 쌩하니 빠르게 노인 옆을 지나치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도 외면하고 싶었던 노인이 다시 여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이번에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성큼성큼 걸어 빠르게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노인은 여자를 보자 참지 못하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젖이 예뻐. 솟은 젖을 어쩌고... 저쩌고..."
무시하고 노인 곁을 지나치려던 여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지 걸음을 멈추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런 말 하면 경찰서에 신고합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노인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노인의 눈은 눈꺼풀이 심하게 쳐진 탓인지 더욱 탁하게 보였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런 말씀은 성추행입니다. 한 번만 더 하시면 경찰서에 바로 신고합니다.”
여자는 작은 체구의 노인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경찰서에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하겠다는 듯이 핸드폰을 노인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제야 노인은 어깨를 움츠리며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또 눈물을 글썽거리고 얼굴도 벌게졌다.
“안 그럴게. 다시는 안 그럴게.”
귀가 잘 안 들린다던 노인은 경찰서 이야기만 나오면 잘도 알아듣고는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말한다.

지팡이를 짚은 손을 더 떨던 노인은 몸을 돌려 서둘러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자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멀어져 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흔들거리는 양팔로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가던 노인은 늙은이답지 않은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빠르게 걷던 노인이 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여자 쪽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든 손을 높이 들어 보이며 얼굴을 찌푸렸다.
노인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 더 급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걷는 속도가 빠른 걸로 보아 잘잘못을 아는 노인이었던 것이다.

멀리 구부러진 산책길을 돌아 사라져 가는 노인을 바라보며 여자는 생각에 잠겼다. 노인은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알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아니, 어떤 인생의 길을 지나쳐왔기에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 80년 전의 노인은 분명 어린 아기였을 것이다. 어린 아기 다운 천진난만한 미소로 엄마를 기쁘게 만들었던 사람이 어째서 저렇게 흉물스러운 사람으로 변했을까?

도대체 노인의 인생에는 몇 번의 태풍이 불었던 것일까? 어쩌면 애초부터 파란 하늘처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드넓은 마음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나뭇가지 몇 개와 나뭇잎들을 태풍에게 내어주고 살아남은 나무들처럼 행동하지 못했을지도...

어떤 사람은 여자를 봐도 음란한 것만 보는 사람은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따르면 노인은 걸어 다니는 죽은 사람이었다. 결국 그 노인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음란마귀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노인이 사라진 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여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노인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여름만큼은 아니지만 늦여름의 태양은 공중에 매달린 채 여전히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뜨거운 공기 사이로 가을을 재촉하는 바람 한 줄기가 여자를 마주 향해 불어왔다. 여자는 귓가를 시원하게 간질이는 바람의 감촉을 느끼며 찡그렸던 얼굴을 폈다. 그러고는 어깨를 쭉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저 멀리 펼쳐진 하늘을 쳐다보며 걸었다.

잠시 후, 맞은편 길에서 걸어오는 키가 큰 남자의 눈이 살짝 아래로 내리 깔리는 것을 여자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도 남자의 셔츠 위로 볼록하게 두드러진 젖꼭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걸었다. 여자는 경멸하듯 쯧쯧거리며 혀도 찼다. 하지만 남자가 쳐다본 것은 여자의 가슴이 아니라 가슴보다 더 불룩하게 튀어나온 여자의 뱃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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