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그림, 사모님한테 얼른 사진 찍어 보내봐, 이번에는 뭐라 답장 오는지 너무 궁금해.”
“그림이 각자 개성 있게 표현되는 것이 너무 신기해요”
“나는 저기 아래에 벤치에서 1시간씩 눕고 올라와, 그래야 그림 그릴 수 있어. 그림도 체력이야. ”
유화반의 회원들은 자신의 그림에 몰입하느라 무적의 적막강산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가끔은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누군가 한 두 마디 보태면서 같이 웃기도 한다. 특히, 강사님이 회원분들의 그림을 마실 가듯 돌아보면서 한 두 마디 내뱉으시는데 자신이 한 말에 본인이 재밌다고 깔깔대며 웃고 그래서 난데없이 조용히 붓질하다 숨넘어가는 회원분들도 계신다.
그림 앞에선 자신의 생각이 다채롭게 열린다. 감각은 이완과 긴장을 반복하면서 자기 세계를 표현한다. 사람들이 가끔 내뱉는 이야기는 고해성사까지는 아니지만 마치 자신의 그림을 걸고 맹세하듯 정직해진다. 툭툭 내뱉는 독백 같은 대사는 자신의 마음이 투영된다. 그림으로 내 생각을 다 토해내는데 굳이 자신을 애써 꾸미려고 들 필요가 없다. 그 중에 K씨의 말소리는 내 귀에 바짝 다가붙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내 사생활이 어느 정도 보호된다는 생각이 들어. 글도 써봤는데 그림이 훨씬 편해”
“나는 예전에는 쇼핑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무척 피곤하고 지쳐. 쇼핑 갔다 오면 하루, 이틀은 몸살 같은 게 걸려. 난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는 게 더 좋아.”
“난 늙어도 내 그림은 젊은 사람이고 싶어.”
“난 커피를 좋아해서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땄잖니. 커피는 내 친구야.”
K가 그림 앞에서 고해성사 연기하듯 대사를 읊을 때면 내 시간은 잠시 정지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교집합을 찾아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스토리가 아니다. 이것은 마치 데칼코마니의 똑같은 그림이 서로를 바라보는 꼴이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림을 그리러 올 때마다 듣는 그녀의 말은 나의 평소 일상 대사였다. 언젠가는 살짝 비켜 가는 지점이 있겠지 싶어 귀를 열지만 갈수록 가관이다. 도플갱어처럼 나로 사는 또 다른 내가 아닐까 싶어 진다.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나 대신 나를 말해주는 그분을 통해 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까지 미리 예습해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내 생각에 대해 나는 어떻게 들리는지 제삼자가 되는 경험도 하였다. 그녀가 자신의 그림 앞에서 들려줄 이야기는 많을 것이다. 나보다 조금 앞서 태어나 나의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는 행복하니까 말이다. 생각을 찍어 붓질하고 나니 나의 세 번째 그림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