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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고딕문학
:과거의 두려움은 부활하는가-2

영화 '기생충'에 있는 자본주의적 고딕문학

by 이차원

*이 글은 결과를 포함한 영화 전반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신 분들은 이 점 유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영화 '기생충'의 고딕적 요소 1

:저택의 비밀과 과거의 망령


이 영화의 특징은 '현실성'과 '환상성'이 플롯, 배경, 인물 등의 영화 전반의 모든 요소에 걸쳐서 '애매모호'한 경계를 가지고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배경과 인물들 자체는 현실적으로 디자인 되어 있지만 그 사이에 기이한 '비밀'들 숨어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중요한 플롯인 하류층인 기택 가족의 상류층인 박동익(박사장)의 가족이 사는 거대한 주택 침입이라는 플롯은 이 저택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구조-지하실과 관련이 있다. 기우가 친구 민혁의 소개를 통해 박사장의 딸 다혜의 가정교사로 저택에 들어가게 된 이후, 여동생 기우가 이 저택에 같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박사장의 아들이자 막내인 다송이가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작중 처음에는 다른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그저 ADHD 기질을 가지고 있는 아이처럼만 묘사되지만, 박사장의 아내인 최연교가 다송이의 생일날 떠난 캠핑을 망치고 돌아왔을 때 가정부로 들어간 기택의 아내 박충숙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그 정체가 완전히 밝혀지게 된다. 바로 다송이 모든 가족이 잠들어 있는 새벽에 생일로 받은 케이크의 남은 조각을 1층으로 내려와 먹고 있을 때, 지하실에서 등장한 한 형체를 목격한 뒤 경기를 일으키며 기절했던 것이다. 그 형체의 정체는 한 남성으로, 전의 주인 때부터 가정부를 하고 있던 문광이 지하실에 숨겨놓았던 남편 오근세가 새벽에 음식을 훔쳐먹으러 지하실로부터 나타난 것을 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연교의 대사이다. "언니도 귀신 믿죠. 다송이가 1학년 때 귀신을 봤잖아요. 집에서"라는 대사는 지하실에 숨어 있는 근세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아주 중요한 대사이다. 그는 연교와 그의 아들 다송에 의해서 유령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가 거주하고 있는 지하실이 이전 세대의 주인-건축가 만들어 놓은 방공호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문광 부부를 제외하고는 이제는 이 저택에 현재 오고 가고 있는 인물들에게 완전히 잊혀져 버린 지하실은, 집의 거주자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유물로 변해버린 이 저택의 기묘한 비밀이 되어버렸다. 근세는 사업에 실패하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자발적으로 들어간 자본주의의 사상자이자 시체, 망령으로서 무덤과 같은 지하실에서 삐져 나와서 자본주의의 승리자인 박사장 가족에게 불쾌함(Uncanny)을 선사하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환경(Setting)을 바라볼 때 이는 더 명확하게 보이며 구체적으로 분석될 수가 있다. 전작 설국 열차에서 열차를 통해 일종의 닫힌 계(Closed System) 안에서의 자본주의 사회를 보여줬던 봉준호 감독은, 전작의 수평적인 닫힌 계를 수직적으로 변화시키면서 계급갈등 논의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동일하게만 진행되지는 않고 그의 시각이 더 날카롭고 깊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점이 있다. 하류층인 기택의 가족은 가장 밑바닥 반지하에 상류층인 박사장의 가족은 가장 높은 언덕쪽에 있는 대저택에 살지만, 그 저택 안에 있는 본래 방공호의 목적으로 쓰였던 지하실이라는 추가적인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설국열차에서의 머리칸 바닥 아래 있는 조그만 공간을 더욱 발전시킨 개념으로 보이는 데, 차이점이 있다면 그 곳에 갖힌 아이는 강제력을 통해서 갖혔지만 지하실에 갖힌 근세는 자의적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 자살'로서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도태된 인물이자 죽었지만 죽어있지 않은 존재, 즉 언데드(Undead)로서의 근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존에 방공호로 쓰이던 공간이라는 것 역시 의미 심장해보인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나서 6.25의 아픔도 세월이 흐르면서 한참 잊혀지고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방공호'라는 공간이,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하에서 도태된 사람들의 도피처로서 기능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공간에서 유령처럼 가끔 튀어나오니, 이는 1편에서 설명했던 과거에 잊혀진 공간이 현실의 공포로서 작용한다는 고딕 소설의 장르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재밌는 점은 그런 근세를 보고 처음에 "너, 맨날 이러고 있는거야?"라고 말하며 무시하던 기택 역시, 마지막 장면에서 박사장을 죽이고서 갈 곳이 없자 결국 지하실로 들어가며 근세가 했던 것처럼 모스부호를 누르며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점이다. 이는 기태가 점점 근세와 동기화 되며 유사한 특징을 가진 캐릭터로 변해가는 것인데, 이것은 고딕 문학에서는 '더블(double)'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더블(double)'이란 흔이 도플갱어(Doppelgänger)라고 말하는 독일어 단어를 영어로 말하는 단어로, 고딕에서는 다른 캐릭터와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관계에 있을 때 사용한다. 이 때, 분석에 있어서 꼭 외형이 유사한 것만 말하지는 않으며 성격, 설정 등 여러가지 요소를 폭 넓게 사용하는 편이다. 결국은 기태 역시 벌레화의 과정을 거친 뒤 근세처럼 퇴화되며 지하실에 박히는 Double이 되어버린 것을 통해, 그 역시 자본주의 하에서 패배자가 되어 버렸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환경 관련된 고딕적 환상성을 보여주는 요소로서 '비'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문광이 다시 등장하는 장면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폭우는 저택에 있을 때는 그저 하나의 경치로서만 기능하지만, 저택을 내려오는 순간 하나의 재앙으로서 기택 가족을 덮치게 된다. 이후 그들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게 되는 반지하의 물난리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재앙으로서 기태의 표정과 어투에서 여유를 아예 없애버리게 되고, 박사장과 그의 아내를 통해 계속 표현되는 '냄새'를 강화하는 원인으로서 기능한다. 결국 자본주의와 자연재해가 합쳐진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기태 역시 근세처럼 사회적인 자살(박사장을 살해한 뒤 지하실로 스스로 들어감)을 택하게 된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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