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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러나 Nov 04. 2023

3-2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자신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인 삶

모든 게 조금씩 늦는 사람이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말 빼고 모든 게 느렸다.


어떤 해에는 두 손으로 세어지지 않을 만큼 바쁘게 인연을 찾아다녔다. 소개팅으로 판단하기엔 이르지만, 결혼을 떠올릴 만큼 좋은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적인 호감 이상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소중한 마음을 돌려보낸 적이 있다.


그 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 혼이 빠져나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장에 숨겨뒀던 새 와인잔을 꺼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와인을 조르륵 따르고 힘없이 테이블에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늦은 새벽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날은 왜 그런 날이었는지, 다음날에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제주의 노을을 보다가 문득 깨달아졌다. ( 깨달았던 이유를 늘어놓기엔 글이 장황해질 것 같아 '문득'이라는 두 글자에 힘을 실었다. )  그날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뉘일 곳이 필요했다는 것. 그리고 사실 그때 그 사람을 좋아했다는 것.


스스로가 조금은 느린 사람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이런데에도 늦는지는 몰랐다. 그런데 그 영역뿐만 아니라, 나는 일에도 그랬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는 건 큰 착각이었다.




일을 버리고 떠나온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일 하는 곳'이었다. 재수가 없었다. 왜 떨어져도 이런 곳으로 떨어진 것일까.  나는 일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일까. 오피스제주에 오기 두 달 전의 나는, 사무공간 사진만 봐도 심장이 조이고 답답했다.  내가 가도 될까, 이곳에 가는 게 맞는 선택일까 혼란스러웠다.  노마드스탭을 제 손으로 신청한 것이었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는 '될 대로 돼라'의 마음도 있었다. 고민하다가 신청버튼을 누른 건, 아마 미래의 내가 내미는 손이었으리라.


번아웃이 올 때 나는 내가 힘든지도 몰랐다. 마우스를 던지고 싶은 순간이 올 때 까지도 몰랐다. 초등학생 수준의 면역력을 갖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몸이 말해줄 때 그제야 알았다.


나는 내가 일에 진심인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주니어지만 스스로를 제한한 적이 없었다.  부서장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일의 처음과 끝을 그리면서 일했다. 자연스럽게 인정과 성취도 따라왔다. 그래서 그때는 그저 나를 밀어붙이는 것에 바빴다.  


나를 건강하게 지켜내며 일하는 것도 곧 '실력'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실력이 한참 부족했다. 아마추어였던 것이다.  회사의 한 책임님은 '돈 받고 일하면 다 프로예요'라고 말했지만, 이미 고꾸라진 나는 돈을 받아도 아마추어였다.  




 

이곳 오피스 제주에는 자신의 업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였다.  남들 노는 제주까지 와서 본인의 일을 위해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매일의 시간을 지워나가는 사람들을 달리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사람들에게 반항이라도 하는 양, 그늘에 앉아 멍 때리고 책을 읽고 낮잠을 잤다. 누군가가 초몰입 상태에 있을 때, 비웃듯이 땅콩잼 토스트를 우적이고 쓸데없는 글을 썼다. 남들이 돈 내고 일하는 곳에 와서 한량행세나 한다니, 마음 한구석에서는 누군가를 약 올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되려 약이 오른 건 나였다.


일에 진심인 사람을 모이게 할 만한 이유를 가진 오피스제주는 뭐랄까, 현실에서 나를 잠깐 빼서 환상 속에 잠시 담그는 경험을 하게 했다.  일의 ㅇ도모르는 사람이어도 이곳을 경험해 본다면 , 단 한 번이라도 본인의 일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가게 될 그런 곳이었다.  이곳에서 세 달 가까이 맴돌며 잃어버린 나를 찾아왔다. 두 가지 사실과 함께.


나는 일에 진심인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일을 사랑했다는 것.


지금 생각해 보건대, 조물주가 나에게 기회를 한 번쯤은 더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일을 완전히 떠난 게 안돼보여서,


그 상심으로 일을 버리기엔

세상에 그려나가야 할 것이 아주 많이 남아있어서,


일을 버린 그 절망에서도

반드시 건져 올려야 할 것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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