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함과 근자감 사이 어딘가
'무슨 일하세요?'
상대를 모서리로 내모는 질문이다.
여기 오피스제주는 '하는 일'로 자신을 설명한다. 이름과 나이보다 먼저 묻는 것이 '뭘 만들어가는 사람이냐'다. 내가 지낸 판교보다 가혹한 곳이다. 판교는 회사+직무+직함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편리한 곳이었다. 몇가지 명사로 자신을 설명하니 얼마나 명쾌한가. 설명시간을 줄여주니 대화의 효율이 금방금방 올라간다.
그러나 제주까지 와서 효율을 찾을 필요는 없다. 효율을 찾는 사람은 애초에 제주의 깡시골까지 오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올리브영에 가려면 차를 30분넘게 타야한다. 이런 곳에서 짧은 설명은 되려 매력이 없다. 명사로 설명되기에는 개운치 않은 사람들이 모인 탓이다.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명사에 자신이 담기기를 포기한 사람이지 않을까. 포기했다는 말보다, 그것이 자신을 담기에는 너무 좁은 것이어서 명사를 버린 사람들이라고 설명해야 옳을 것 같다.
서로 소속이 있는 지조차 궁금하지 않다. 나이도 소유도 궁금하지 않다. 한 사람의 일 이야기를 듣다가 인생이야기가 되어버려 밤을 그냥 지새버려야할 것 같은 곳이다. 그렇다고해서 깊고 진한 인생이야기를 나누는건 아니다. 심지어 사적인 이야기도 거의 나누지 않는다. 아주 느슨한 연대속에서 자신의 운동기록을 공유하며 매일 각자의 일을 가꾼다.
여기서 나를 설명해야하는 순간이 왔다. 매주 수요일마다 점심식사를 함께하는 미식회가 열리는데, 스탭이라서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일로서는 아무것도 말할게 없는 사람인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무런 일을 안한지 두달이 넘어가기도 했고, 이전에 했던 일을 더는 하지 않을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직에 대해 별로 밝히고 싶지 않았다. 악과 독이 마음속에 그득그득 했던 탓이다.
그래서 설명해야할 순간을 기어코 맞이한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약간 초라해진듯한 느낌도 받았다. 마치 소풍날 다들 엄마가 싸준 예쁜 도시락을 준비해왔는데, 내 가방속에서 꺼내야하는 건 검정봉다리에 담긴, 마트에서 사온 참치김밥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어렸을 적 '초라함'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꼈던 그 기억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와 목구멍을 밀어냈다.
'전직 인사담당자예요. 지금은 퇴사한'
이것말고는 나를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내가 했던 일은 과거에 이미 펼쳐놓은 것이라 부정할수도 없다. 그것과 화해하지 못한 내 자신만 있을 뿐. 과거의 나와 화해하기 위해 다시 용기를 낸 것이다. 당시엔 약간의 패배감도 들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일이었다. 인사담당자였던 내 과거를 미워하지 않는 것,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답을 피할수도 있었지만 기어코 인사(hr)에 대한 이야기를 해버린 것이 치유의 물꼬를 터주었다. 식사 내내 아주 오랜만에 회사에서의 기억과 일들을 떠올렸다. 잠시 인사담당자인 나를 긍정했다. 마트에서 사온 참치김밥, 아니 초라함이 아주 뒤늦게 건넨 사과였다. 서른이 넘었으니 이제 그 사과를 받아줄만큼도 컸다. 그래서 여기 평화가 가득한 오피스제주에서 의도치않게 일과 다시 마주했다. 일 말고, 어쩌면 나의 일부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