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이 현실이 되던 날
드디어 집에 왔다. 이제야 긴-긴 여행이 끝난 기분이다. 사실 이 긴 시간을 '여행'이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싫었다. 제주에서의 삶이 비일상이 아닌 일상의 시간이었음이 분명한데, 단지 여행이 주는 환상으로 치부될까 봐 겁이 나서였다. 그래서 차라리 평행세계를 살았다고 믿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여정이 주는 낭만을 둘러댈 말이 아직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항복하는 마음으로 여행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만다. 그리고 엉뚱하지만 지난여름부터 이 '여행'이 끝나고 몇 달 만에 집에 돌아간다면 어떨까,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기억을 꺼내봤다.
본격적으로 상상한 건, 여행산문집을 읽다가였다.
누군가가 네가 없는 너의 빈집에 들러 너의 모든 짐짝들을 다 들어냈다고 해도 너는 네가 가져온 새로운 것들을 채우면 될 터이니 큰일이 아닐 것이다. 흙도 비가 내린 후에 더 굳어져 인자한 땅이 되듯 너의 빈집도 네가 없는 사이 더 견고해져서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 형편없는 상태의 빈 집과 잔뜩 헝클어진 채로 돌아온 네가 서로 껴앉는 것, 그게 여행이니까. 그렇게 네가 돌아온 후에 우리 만나자. 슬리퍼를 끌고 집 바깥으로 나와 본 어느 휴일, 동네 어느 구멍가게 파라솔 밑이나 골목 귀퉁이쯤에서 마주쳐 그동안 어땠었노라고 얘기하자. -이병률 여행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26 잘다녀와 중에.
이 페이지는 내내 가슴에 남았다. 형편없는 상태의 빈집과, 잔뜩 헝클어진 채로 돌아온 내가 서로 껴앉는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를 자꾸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기억 속의 집은, 아늑하고 따뜻하며 공간에 들어와 있기만 해도 마음이 녹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두 달 내내 주말마다 집들이를 했다. 사람들을 불러서 먹이고 마시고, 위로하고 기뻐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요새 같고 온실 같던 집을 떠나, 조수석에 아무도 태울 수 없을 정도로 짐을 꽉꽉 채워 제주 최남단까지 다녔던 건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을 하나로 정의하고 정리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건 이 집을 버리고 가서 더 큰 집을 지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는 '낯선 그 어느 곳에 가서도 잘 지낼 것'이며,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으며, 전혀 새로운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건 사실은 진실한 내가 되는 것' '스스로를 그 어떤 것으로 정의할 수 없는 시간을 살만큼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도 담아 왔다. 나에게 담긴 것은 가득 채워지다 못해 흘러서 머리카락에도, 입은 옷에도 냄새가 밴 것 같았다.
그런 채로 돌아왔으니, 집에 오자마자 나는 너무 무거워 무너져버리지 않을까. 털썩 주저앉아 바닥에 이마를 대고 그저 울지 않을까. 뜨거웠던 여름과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아쉬움, 이제야 끝이 났다는 허탈함, 텅 빈 집을 다시 마주하며 이곳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 하는 막막함 같은 것도 더해져 용량이 꽉 찬 디스크처럼 곧 터지지는 않을까.
이윽고 그날이 됐다. 12월 3일.
띠띠띠띠- 문이 열리는 소리는 이 여행이 끝났음을 알리는 벨 같았다. 그런데 아뿔싸, 문을 열려던 순간, 걸려온 전화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반드시 받아야 하는 전화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맞이하는, 고대하던 그 순간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행히, 나는 아주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문을 열었는데 아주 깊이 들어온 따사로운 햇살 때문에 마음이 녹았다. 집은 여전했다. 지난 니스여행을 떠오르게 하는 남향의 햇살. 바르셀로나 여행을 기억하게 하는 고됨과 짠함, 그리고 바닥에 누우면 더 잘 보이는, 제주에서도 보던 하늘.
집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시선이 멈췄다. 하얀 천위에 고이 접어둔 빨간 리본. 집을 비운동안 머물었던 세입자가 두고 간 것이었나 보다. 그 빨간 리본은 마치 이 집이 선물인 것 마냥, 이 집을 선물포장해 둔 것 같아 보였다. 온통 하얀 집에 빨간 리본이라니.
맞다. 이 집은 선물이 맞았다. 이 집 덕분에 제주에서, 언니네 집에서, 부모님 집에서 지내는 동안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월세로 새로운 도전도 할 수 있었으니까. 이 집을 비운 동안에도 선물이었고 다시 찾은 순간에도 선물이었다. 드디어 온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되찾았고 그것이 주는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제주도에서 지내며 디지털 노마드를 잠시 꿈꿨지만 그걸 현실로 옮기지 못했던 건 육지에 두고 온 이 집의 안정감 때문이었을 것 같다.
짐을 내려두자마자 해가 드는 자리를 찾아다니는 고양이 마냥, 몸을 이리저리 틀어 햇살을 맞다가 앉은 채로 소파에서 낮잠을 잤다. 고단했던 마음 끝에 되찾은 평안이었다. 그리고 햇살 아래서 노트북을 켰다. 남은 이야기들을 써 내려갈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도 오늘은 써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이 안정감속에서 제주를 단단히 추억할 생각을 하니 절로 기대가 됐다. 내일 아침엔 따뜻한 커피, 갓 데운 소금빵, 좋아하던 책을 쌓아두고 글을 써야지. 이 도시에서 다시 내려다보는 제주에서의 기억들은 나를 과거에 잠기게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할 원동력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잘 돌아보고, 앞으로 잘 살아보자는 다짐을 시작한다.
이제 다시 1일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