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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개기의 위대함

이불학개론

by 샨잉

올여름부터 이불을 개기 시작했다. 그동안 숱하게 이불정리에 대해 들어왔을 터지만, 나의 뇌리에 각인된 이불정리의 필요는 유퀴즈에 나온 배우 김희애 님의 발언이다. 김희애 님은 아들 둘에게 하는 유일한 잔소리가 ‘일찍 자라, 이불 정리해라’ 두 가지라고 했다. 그러자 조세호 씨가 말한다. “이게 왜 안 될까요? 저희 어머니도 항상 이불 정리하라고 해도 40년간 안 됩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김희애 님의 단호한 대답. “하세요.” 당황한 조세호 씨가 다시 말한다.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또 누울 건데 왜 합니까?” 김희애 님은 답답해하며 “자기한테 선물이에요. 그거 1분도 안 걸리잖아요. 그것도 안 하고 뭘 하려고 그래요. 인생을 조금 더 산 누나로서 정말 좋아요. 제일 중요한 얘기예요.”라고 말했다.


방송의 효과가 어찌나 큰 지, 방영된 지 1년도 더 지났지만 저 장면은 기억에 콕 박혔다. 내 입장은 조세호 씨와 같았다. 어차피 또 누울 건데 굳이 왜. 이불정리가 그렇게 중요한가. 침대생활을 오래 한 나는 침대 위에 이불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다. 이불정리는 아주 가끔 집에 손님이 오거나 할 때, 집을 치우다가 유독 이불이 거슬리는 날에 하는 정도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는 작은 아이 하나로도 벅찼기에, 집에 손님이 오든 말든 매트리스 위나 바닥에 깔린 요 위에 이불들이 어지럽게 존재감을 뽐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다 결혼 3년 만에 공간을 잘 가꾸고 싶은 집으로 이사를 오며 처음으로 살림 관련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좁은 집에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살려면 공간 활용을 똑똑하게 해야 했다. 주로 일본 사람들의 미니멀라이프 관련 책을 읽었는데, 그들의 집안일 루틴에 이불정리가 있었다. 매일 이불을 털고 햇볕에 말려 살균하는 사람, 매트리스까지 세워서 치우는 사람 등. 살림에 진심인 다양한 사례를 읽다 보니, 저렇게 까지 할 자신은 없지만 이불 정도는 갤 수 있겠다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여름이라 이불은 얇고 가벼웠다. 이불 두 개를 개서 포갠 후 그 위에 베개들을 올렸다. 맨 위에는 아이의 커다란 코끼리 인형을 두었다. 이불이 사라진 텅 빈 매트리스 위에는 굴러다니며 갈 곳을 잃은 커다란 쿠션 두 개를 나란히 놓았다. 이불을 털 자신은 없으니 이불을 개고 난 자리를 돌돌이로 굴려가며 먼지와 머리카락 등을 떼어냈다. 김희애 님의 말처럼 이불정리는 1분이면 끝났다. 한 번 시작한 이불 개기는 내 삶에 새로운 루틴을 만들었다. 남편과 아이가 나간 집에서 창문을 활짝 열고 이불을 개는 것이다. 이불을 개고 돌돌이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어질러진 집 안을 치운다.


이불 개기 초반에는 괜히 해야 할 집안일 목록이 하나 더 늘어난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일로 큰 효과를 주는 것이 있던가. 하루에도 수십 번, 열린 방문으로 이불이 개어져 있는 방을 볼 때면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진다.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가을이 되어 도톰해진 이불이 3개나 될 때는 이불을 개려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겨울이 찾아와 다시 이불이 2개가 되니 이불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볍다. 이제는 이불이 널브러져 있으면 내 마음이 어지러운 것 같다. 귀찮음을 이기고 이불을 개고 나면, 단정해진 방처럼 내 마음도 말끔해진다. 이불을 개고 나니 이불을 개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돈의 속성의 저자 김승호는 돈을 모으는 네 가지 습관 중 하나로 이불정리를 말한다.


자고 일어난 이부자리를 잘 정리한다. 자신이 자고 일어난 자리를 정리하는 것은 삶에 대한 감사다. 음식과 잠자리는 삶의 질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편히 잠을 잘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잠자리에 대한 예의를 보여야 한다. 이불을 펼쳐서 털어내고 구겨진 베개를 바로 하여 호텔 메이드가 정리해 준 것처럼 정리를 해놓는다. 엉크러진 잠자리로 저녁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을 모욕하는 일이고 매일 같은 짓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조롱하는 일이다. 하루를 마치고 저녁 잠자리에 들 때 자신이 잘 정리해 놓은 침대로 들어가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사람이다. 이런 사소함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나에게 이불정리는 잠자리에 대한 예의도, 나에게 주는 선물이나 인생의 위대함처럼 거창한 것도 아니다. 이불정리는 그저 매일매일 반복되는 많은 집안일 중, 가장 작은 것으로 큰 효과를 주는 고마운 일이다. 제각각 놓여있는 신발을 가지런히 정돈한 현관을 보는 것처럼, 몸을 잠깐 움직여 이불을 정리했을 뿐인데 그 단정함이 주는 만족이 크다. 이것은 작은 성취의 기쁨이다. 더 나아가 어제와 비슷해 보이는 오늘 하루도 그냥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정리된 이불을 보면 그래도 내 삶이 예전처럼 힘들지는 않구나, 더 나아지고 있구나라는 안도감이 생긴다.


이렇게 이불정리를 하다 보면, 나도 호텔방에 가서 이불을 정리하고 나오는 사람이 될까.


결국 큰 일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작은 일들을 대하는 방법은 결국 우리가 커다란 일을 대하는 방법을 비추는 거울이다. <버리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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