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분이 당연무효가 아닌 한, 행정쟁송 거쳐야
세금과 관련된 행정소송(취소소송)은 조세심판원 등의 결정서를 받은 날로부터 90일 이내에 제기해야 한다는 제소기간의 제한이 있습니다. 만약 이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면, 억울한 사정이 있더라도 더 이상 행정소송으로는 다툴 수 없게 됩니다(불가쟁력 발생).
이와 같이 행정소송 제소기한을 놓친 납세자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고려하는 것이 바로 '민사소송(부당이득반환청구)'입니다. 그러나 법원은 납세자가 행정소송 대신 민사소송을 제기한 경우, 그 처분이 당연무효인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납세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원심에서는 '당연무효'가 인정되었으나, 대법원에서 '당연무효'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된 사례(대법원 2025. 11. 6. 선고 2025다214743 판결)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은행인 원고는 고객의 실명 확인 절차를 거쳐 계좌를 개설해주고 이자를 지급할 때 일반 소득세율(14%)을 적용해 원천징수 납부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피고(대한민국 등)는 검찰 수사와 국세청 조사 결과를 토대로, 원고의 일부 계좌가 '차명계좌'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금융실명법) 제5조를 적용하여, 해당 계좌의 이자소득에 대해 무려 90%의 세율을 적용한 차액을 납부하라고 고지했습니다.
원고는 일단 이 세금을 납부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 계좌들은 단순 차명계좌일 뿐, 금융실명법상 징벌적 세율이 적용되는 '비실명 금융자산'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과세 처분을 취소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곧바로 피고들을 상대로 "잘못 낸 돈을 돌려달라"는 민사상 부당이득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원심(2심) 법원은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원천징수 대상이 아닌 소득에 대해 세금을 걷어갔으니, 이는 법률상 원인이 없는 부당이득이며 당연무효"라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핵심 쟁점은 "과세관청의 납부 고지가 존재하는데, 이를 행정소송으로 취소하지 않고 민사소송에서 곧바로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대법원은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행정처분의 '공정력'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세 부과처분은 행정행위로서 일종의 공정력(권한 있는 기관에 의해 취소되기 전까지는 유효한 것으로 통용되는 힘)을 가집니다. 따라서 과세처분의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하여 당연무효'가 아닌 이상, 행정소송을 통해 그 처분을 취소하지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민사소송으로 부당이득 반환을 청구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징수처분의 성격을 간과했습니다.
원천징수 소득세는 소득 지급 시점에 납세의무가 자동 확정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과세관청이 "세금을 덜 냈다"며 납부할 세액을 정하여 고지했다면, 이는 '징수처분'의 성격을 갖습니다. 이때 과세관청의 의사가 대외적으로 공식화된 것이므로, 이에 불복하려면 원칙적으로 행정소송(항고소송)을 제기해야 합니다.
셋째, 법리 해석의 다툼이 있다면 '명백한 하자'가 아닙니다.
대법원은 설령 피고가 금융실명법 적용을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곧바로 처분이 '당연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사실관계나 법률 해석에 다툼의 여지가 있는 경우라면, 이는 취소 사유일 수는 있어도 하자가 명백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은 "해당 징수처분에 중대하고 명백한 하자가 있어 당연무효인지 여부를 심리하지 않고, 단순히 법 적용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이득을 인정한 원심은 잘못되었다"고 판결했습니다.
과세관청의 통지를 받았다면, 우선 행정쟁송을 통해 그 처분을 없애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과정을 건너뛰고 민사소송을 제기하려면, 그 처분이 누가 봐도 명백하게 잘못된 '당연무효' 수준이어야 하는데, 실무상 이를 인정받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억울한 세금 문제가 발생했다면, 섣불리 민사소송을 생각하기보다 초기 단계부터 행정쟁송 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올바른 절차를 밟으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