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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럽키진 Feb 19. 2022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도 사랑이야

내 마음은 기능성 위장장애 2

 "엄마, 코로나 때문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엄마도 힘드시니까 봄에 갈게요."

 "그래. 서운하지만 어쩔 수 있냐. 이번 설에는 그냥 쉬련다. 봄에 따뜻해지면 와라"

 "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곶감 보냈어요."

 "안 그래도 곶감 먹고 싶어서 장에 갔더니 비싸기만 하고 해서 안사고 그냥 왔는데.."

 "사길 잘했네. 맛있게 드시고요."


 엄마 연세가 벌써 여든셋이다. 일곱 딸은 모두 도시에 살고 있고(큰 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끝까지 우린 칠공주) 부모님만 시골에 사신지 벌써 이십오 년이 넘었다. 그마저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사신지 오 년이 되었는데, 평생을 '징글징글 몸 소리가 난다'며 끔찍하게 다투신 기억밖에 없어선지 돌아가신 지 한 두 해는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실까 봐 무서우셨단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마음. 부부가 어떻게 살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던 그 해 여름, 뒤늦게 암 진단을 받은 것을 알려드렸다. 병원에서 별다른 치료할 것이 없어 요양병원으로 옮기기를 권하였다. 갑작스럽게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입원을 하시게 된 거라 아마도 이대로 시골 땅을 못 밟으실 거란 생각은 전혀 못하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시골집으로 가서 며칠만이라도 계시고 싶어 하셨고, 딸들도 그렇게 하자고 구급차를 타고 전라도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는데,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될 줄은 몰랐다. 엄마가 단칼에 반대를 하셨기 때문이다. 엄마가 그렇게 완강하게 못 오게 하시는 걸 보고 솔직히 처음엔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었다.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에 육십여 년 정든 마을, 시골집을 못 오시게 하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그러나 엄마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이해를 할 수밖에 없다.



 엄마는 딸들이 부담스러울 만큼 희생을 사서 하시는 분이다. 김치를 사서 먹겠다고 해도 지금까지 김장을 하셔서 택배를 보내신다. 물론 이제는 악으로 버틸 힘도 허리가 굽어 못 내시지만, 밭에 심은 배추를 수확하고 김장에 들어가는 스무 가지가 넘는 재료들을 모두 준비하신다. 배추에 뿌릴 비료가 남아있다는 핑계로 내년까지는 딸들이 시골로 내려가 배추를 버무려야 한다. 물론 전라도 엄마 솜씨 김치는 금치를 준다 해도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맛있다. 그러나 김장을 끝내고 일주일은 몸살이 나시니까 딸들은 걱정을 해서 그만하자고 하는 것인데, 엄마 고집은 꺾을 수가 없다. 조금만 게을러지셔도 되는데, 젊은 딸들보다 더 부지런하시고 손이 빨라서 따라다니기에도 벅차다. 이렇게 평생을 사셨으니 몸이 남아나겠느냐고 해도 어차피 죽으면 없어질 몸 왜 아끼느냐고 하신다.



 명절에도 가족이 모이기만 하면 대가족이 되어버리니까 한꺼번에 내려가지 못하고 나눠서 가야 한다. 연세가 드신 후에는 많이 힘들어하시는 게 더 느껴져서 평상시에는 몰래 방문하기도 한다. 자식이 집에 온다고 하면 이주 전부터 아니 마음은 이미 한 달은 족히 준비를 하고 계시면서 힘들어하시니까. 장날 세네 번 장을 보시고, 집안 청소, 음식 장만을 하시며 내내 기다리신다. 와서 먹을 음식뿐만 아니라 딸들 챙겨서 보낼 것까지 준비하시니까 평상시에도 늘 잔치하는 수준으로 힘들어하셨다. 그러니 자식들이 내려갈 즈음엔 이미 지쳐계신다. 몸져누워 계셔야 할 정도로 체력도 안되시면서 무리를 하시니까 고향을 내려가고 싶은데, 내려가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된다. 혼자 지내기 외로우실 엄마 생각하면 가고 싶은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자식들이 내려가기 이주 전부터 준비를 하시고, 이박 삼일 함께 지내는 중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삐 움직이시느라 정작 가만히 앉아 얼굴 보며 얘기조차 할 시간이 없다. 밥 먹고 치우고를 몇 번 반복하고 두 번 자면 헤어질 시간이다.



 과연 이것이 자식을 위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엄마가 딸에게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이해해 보려고 했는데, 내려갈 때마다 그러시니 마음이 불편하고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시면 정말 바라는 건 이게 아닌데 하면서 속상하다 못해 화도 났었다. 이제는 연세가 드시니 자식들이 간다고 해도 본인이 부담스러우신 모양이다. 예전처럼 몸이 안 따라주니 일도 못하시겠고, 이것 저것 챙겨주자니 몸이 힘드시고, 못 챙겨주면 미안하고 해서 선뜻 오라고 말씀을 안 하신다. 딸들이 식사 준비할 음식을 다 가져가도 본인이 안 하면 답답해하신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은근히 완벽한 성격이시다. 그래서 남의 손에 잘 안 맡기신다. 다 큰 딸이 한다고 해도 못 미더운지 여기저기 참견을 하시느라 더 피곤하신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차근히 뭘 가르쳐 주신 적이 없었다. 농사철 바쁘신데도 데려가서 일을 시키기보다는 그냥 놀라고 하셨다. 아니면 거의 혼자 하셨다. 옷 버리니까 하지 말라 하셨지만 지금 와서 보니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훨씬 빠르고 에너지가 덜 쓰였던 것 같다.



 취업을 하고 가장 불편하고 스스로 한심했던 것이 있었는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과 친구들, 선배들 정도의 관계만 있으면 되었고, 크게 센스가 없어도 살 만했었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말 안 해도 뭘 해야 하는지 알아채야 하고, 분위기 파악도 잘하면 좋고, 서열이 분명하니 원만하게 맞춰갈 줄도 알아야 한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이런 교육은 받지 못했다. 여섯 명의 언니가 있어도 사이좋게 차근차근 얘기해 주는 언니도 없으니 처음 직장 생활은 매일 깨지는 날의 연속이었다. 대부분 신입 시절엔 그렇겠지만 유독 더 심했고 힘들었다. 그때 살짝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것저것 어릴 때부터 경험도 시켜주시고, 일도 많이 시키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세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이들은 어릴 때 모든 것이 호기심이다. 빨래하면 하고 싶다고 하고, 설거지, 화분 물 주기, 자전거 바퀴 바람 넣기.. 부모가 하는 모든 것을 신기해하며 나도 시켜달라고 한다. 그때 잘 가르쳐 줘야 한다. 위험한 것만 빼고 친절하게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주 잘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새로운 일을 하는 것에 즐겁고, 자신감이 있다. 경험은 이렇게 쌓는 것이다. 나중에 커서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께 받지 못한 것들을 그대로 자녀에게 똑같이 하지 말고, 현명하게 적기에 가르쳐야 한다. 뭐든 호기심을 갖고 배우고자 할 때 귀찮아하지 말고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농사일이 바빠 가르쳐줄 여유가 없어서, 아이가 하다가 실수하면 일이 커질까 봐, 완벽한 성격 탓에.. 이해는 되지만 지금까지도 팔순이 넘은 연세에 자식에게 맡기지 못하고, 그래서 딸들 얼굴도 마음 편히 못 본다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한시도 가만히 계시지 못할 바에는 조금 게으른 엄마가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까지 변하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인데, 십 년째 고민 중이다. 고향집을 나서기 전, 엄마의 굽은 허리와 힘든 얼굴을 보고 있자면 다음번엔 또 올 수 있을까 하면서도 짧게나마 엄마 얼굴을 보러 또 갈 것이다. 이런 고민도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때가 그리울 텐데.. 오늘 엄마는 무엇을,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셨을까. 엄마는 딸들의 이런 마음을 아실까.



 이런저런 생각 말고 전화나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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