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럽키진 Feb 19. 2022

엄마는 아이에게, 아이는 엄마에게

육아, 결코 쉽지 않지만 어렵지만도 않은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일단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몇 시간이라도(아이들 학교 보내고) 즐겼던 시간이 그리웠다. 목소리가 크고 활동 많은 아이들과 종일 함께하는 날은 귀와 눈이 좀 혼란스럽다. 머리도 어지럽고..

그럴 땐 아이들이 책을 읽고 놀 때, 아이들에게 "엄마 방에서 책 읽을게 " 하고 들어와 문을 잠그고 자유를 즐긴다. 문을 잠그는 이유는 불쑥 막내가 들어와 간식을 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함께 얘기하자고. 한 시간이라도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아이들과 양질로 함께할 수 있으니 이것은 지켜져야 한다.



​​  이렇게 세 아이가 있는 데도 내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할 일을 스스로 하고, 책을 읽고, 몰입해서 놀고 공부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5세 이전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힘들지만 듬뿍 사랑 주며 놀아주는 이유 중 하나는 그만큼 빨리 독립도 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 때문이다. 그 믿음은 실망을 주지 않았다.



 집안일은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하며 뒤로 미루고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이 항상 우선이었다. 그러니 집이 깨끗할 수 없고, 빨래와 설거지는 늘 쌓여있었다. 그러나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집안일만 잘하고 아이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면 엄청 후회가 되었을 것이다. 함께 한 시간보다는 얼마나 아이와 소통하며 즐거웠느냐로 아이는 사랑을 채운다. 그것은 엄마의 판단이 아닌 아이의 판단이다. 그래서 그 지점을 알 수가 없다.


 ​어떤 아이는 빨리 채워지고, 어떤 아이는 채워지려면 더 많은 사랑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애착을 넘어 더 큰 신뢰로 이어져 엄마의 실수와 잘못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공감과 배려와도 연결되는 아주 큰 채움이 된다.


 ​물론 직장에 나가 일하지는 않는다. 큰 아이를 낳고 십칠 개월에 일을 그만두고 전업 육아를 하게 되었다. 삼 개월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한 다음, 아이도 곧바로 어린이집에 다녔는데 매일 감기에 기관지가 약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천식 진단 내리기 직전이었는데 사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학병원에서 삼 교대, 남편은 영업직 평상 근무였는데 가능한 사람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데려오고, 함께 놀아줄 수 있는 사람이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밤 근무할 때를 빼곤 나와 아이의 시간이 훨씬 많았지만, 그 시간이 피곤한 줄 모르고 행복했다.


​ 남편도 아이가 잘 자니까 혼자 데리고 자기 무서웠다고는 하나  아이가 깨서 우유를 달라고 하지도 않고, 잠을 깨우는 일이 없으니 내가 밤 근무를 나갈 때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둘째를 낳자고 하는 것을 보니 아이가 이렇게 다 그냥 크는 줄 안 모양이다. 큰 아이가 한 달에 절반은 열이 나서 밤을 새워 돌보고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신기할 정도로 엄마가 밤 근무가 아닐 때만 아팠고, 아빠와 자는 날은 아이도 잘 잤으니 알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육아를 하면서 흔히 볼 수 있는 맞벌이 부부의 모습이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밤새 간호를 하고 똑같이 출근을 한다. 엄마는 아픈 아이의 걱정으로 온통 차있어 힘든 내색도 할 겨를이 없다.

 ​

 면역 형성이 되기 전부터 어린이집을 가다 보니 감기를 달고 살았고, 모세 기관지염이 계속되다 보니 한 번만 더 모세기관지염 증상이 나오면 천식으로 진단을 내릴 것이라는 의사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아이를 더 이상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었고, 쌕쌕 소리를 내며 호흡이 어려운 아이를 맡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도와줄만한 사람도 없어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처음에 그만두겠다고 남편에게 얘기했을 때, 남편은 당황해했었다. 경제적으로 외벌이로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테고,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일을 그만둔 결정적인 계기는 아이가 아픈 것이 첫째지만, 시어머니의 말 한마디 때문이기도 했다.

"누가 계속 다니라고 하던?" 삼교 대하며 피곤하고 힘들게 일하는 며느리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것저것 대우를 받고 싶어 하시길래 아이가 자주 아프고 나도 일하느라 힘들다 했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셨다. 남편 여동생은 임신을 하고 바로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만두지 않고 일하는지 모르느냔 말이다.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는 그 한마디에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람 하며 직장을 그만두기로 맘먹었다. 물론 바로 그만둘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몇 개월은 더 다녀야 했지만 아픈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돌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월급이 아쉬웠지만, 아이와 매일 뒹굴며 놀아주는 게 많이 행복했다.


 대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 간호사 경력이 있는 나는 그래도 아픈 아이를 돌보는 것에  어려움이 많지 않았고, 다행히 입원하는 일은 없었다.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더 이상 모세 기관지염으로 병원 가는 일은 없게 되었고, 천만다행으로 천식 진단은 받지 않았다. 그 후로 어떻게 하면 아이를 행복하고 똑똑하게 키울 수 있을까에만 온 신경을 썼다.


 ​부모에게 받은 우울한 기운과 부정적인 사고를 벗어던지고 아이에게 절대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많이 노력했다. ​큰 아이가 두 돌이 되기 전에 아동심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되풀이되지 않는 삶을 위해서는 아이의 심리를 아는 배움이 절실했고, 공부를 하면서 아이보다 내 심리를 아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휴학을 반복하며 5년 만에 사이버대학 심리상담학과를 졸업했다. 중간, 기말고사와 과제를 하면서 아이들이 자는 시간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고, 힘든 중에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한 것은 두고두고 뿌듯해할 자존감 상승의 원천이었다.



 큰 아이는 어릴 적 엄마가 밤 새 가며 공부하고 성적표 보여주며 자랑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엄마는 늘 노력하며 도전하는 사람으로, 발전하는 삶에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엄마는 도전 중이다. ​도전은 평생 계속될 것이다.



​어릴 적 받은 사랑으로 평생을 살아. 어릴 적 받은 사랑이 없다면 아이를 키우며 아이에게 받은 사랑으로 남은 생을 살아.

​엄마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아이에게 받은 사랑이 더 크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병은 아니라는데 자꾸 아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