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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럽키진 Feb 18. 2022

부모에게서 채우지 못한 인정 욕구가  날 괴롭힐 때,

가운데 골목 딸 부잣집


 “ 아 거기 가운데 골목 딸 부잣집 막내라고?”

마을에서는 이렇게 말하면 누구나 아는 그 집이었다.


 태어나고 보니 부모님과 여섯 언니가 있었고, 전라도 시골 마을 가운데 골목 딸부자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번에는 뭐 낳았냐?"라고 물어볼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는 언니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아이를 낳으면 대문에 금줄을 매다는데, 또 새끼줄에 숯을 매달았다. 축복은 고사하고 초상집 분위기라니.. 아버지는 말없이 인상만 쓰시고, 어머니는 몸조리도 못하고 우시는 모습이 언니들 눈에 선하다고 하였다. 지금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는데, 아마도 아들을 원하시던 아버지와 괜한 죄인이 된 것 같은 어머니 사이에서 어리지만 분위기 파악이 되었나 보다.


 부모님께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첫아들은 3살에 홍역으로, 둘째 아들은 5살에 뇌염으로 하늘나라에 보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질병 치료하기 힘들고, 시골이라 아프면 병원에도 못 데리고 간다지만, 연달아 두 아들을 잃었으니 그 마음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귀한 아들 둘을 가슴에 묻고 아들을 고대하며 임신한 배를 보셨을 텐데, 낳으면 딸 또 낳아도 딸.. 그 당시 어머니는 산파도 없이 혼자 아이를 낳으셨다고 했다. 앞집 할머니가 오신 적도 있으셨지만, 그 이후에는 가세(가위)를 끓는 물에 담가 탯줄 자를 준비를 하시고 혼자 낳으셨단다. 그 가위도 농사철에 고추를 말리고, 투명하고 빨간 고추를 반으로 잘라 씨를 뺄 때 썼던 것이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를 낳고 반나절도 못 누워 계시고 밥을 하셨단다. 아버지 구박에 그다음 날은 농사일을 하러 나가시고, 심지어 밭에서 무 씨를 심다가 진통이 와서 바로 낳았다는 딸도 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마저 보내고 땅 속에 묻어둔 아들을 찾아가 밤 새 울며 몇 날 며칠을 곁에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때 아버지가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닐까 걱정할 정도로 상실감이 심하셨다고 하는데,  사실 예전에는 그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떠올려 보니 그 슬픔은 어떤 무엇으로도 표현이 안될 것 같다.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니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다. 아버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적으로 그때의 아버지를 상상하니 마음이 많이 아프고, 그냥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럼, 어머니는 아홉을 출산하신 건가? 어렸을 땐 알지 못했던 비밀 같은 일. 내가 태어나고도 동생이 생길 뻔했지만, 안타깝게 돌이 채 되지 않아 아팠고 언니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세상을 떠났다. 길게 인연이 된 딸만 일곱인 것이다. 그마저도 큰언니는 53세에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현재는 딸 여섯. 은근히 '칠공주'라 자랑했었는데, 큰 언니 없는 여섯은 어색하다. 그 보단 슬퍼서 생각을 안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 하였던가.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남편 복도 자식 복도 없다며 우시던 엄마. 큰 딸을 가슴에 묻고 8년째, 웃음을 잃으셨다. 소녀 가장처럼 고생만 하다가 보낸 딸에게 미안하고, 엄마 팔자 닮아 잘 못살았나 자책도 하시고, 결혼을 잘 못 시켜 그러나 후회도 하시면서. 봄에 나비가 날아와 뜰에 앉으면 큰 딸 아닌가 가슴을 쓸어내리시고, 꿈에서라도 통 보이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신다. 아마도 언니가 살아 있을 때 잘해주지 못했던 게 마음이 많이 쓰이시나 보다. 두 팔 모아 안아줘 본 적이 없어서..


 어머니는 해마다 한 해 운을 보신다며 용하다는 점 집에 가셨다. 가난한 집이었기에 돈 대신 보자기에 쌀을 한가득 넣어서. 어릴 적 몇 번 따라가 본 적이 있다. 구경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글을 잘 못 쓰시는 어머니 대신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 함께 갔다. 쌀 점을 치시는 분이신데, 가족 모두 좋은 일과 나쁜 일, 조심해야 할 것들을 일러 주었다. 어머니가 그분을 용하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으시다. 딸 둘 정도를 낳았을 무렵, 언제쯤 아들을 낳을까 해서 여쭈었더니 사주에 '딸만 일곱'이라고 하셨단다.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된다 하고 잊고 사셨는데, 결론적으로 그 말이 맞았다는 웃픈 기억.  또 하나는 마흔 즈음 아버지가 허리가 많이 아프셔서 걸어 다니지도 못하고 한참을 누워 계셨는데, 침을 맞고 약을 먹어도 잘 낫지 않다가 그분이 좋다는 방법으로 나으셨단다. 미신 같은(?) 방법이어서 혹시나 하고 따라 했는데.. 그 방법이 궁금해 어머니께 여쭈어 보니 기억이 전혀 나지 않으시단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모든 부분을 지우셨는지.. 아버지는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알 수 없다. 2017년 9월에 돌아가셨으므로.




 

 아버지는 아들이 없다는 말이 평생 한으로 남으셨지만, 딸 셋을 대학을 보냈다며 아들 있는 집을 향해 큰 소리를 치곤 하셨다. 내가 어릴 적 '자식이 없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됐었다. 이렇게 딸이 일곱이나 되는데... 왜 자식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오시는 날이면 유난히도 화를 많이 내실까 하면서. 어떤 일로 동네에서 다툼이 생기면 꼭 끝에는 '자식도 없으면서'라는 말로 아버지를 공격하셨나 보다. 아버지의 아킬레스건은 아들인데.. 어김없이 그런 날은 술을 드시고 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불안에 떨며 부랴 부랴 피신을 준비했다. 마치 악의 연결고리가 딱 맞게 끼워지는 것처럼. 언제나 부부싸움의 원인은 무수히 많고, 고스란히 자식이 희생량이 된다.


 딸 일곱 중에 세 명의 이름에는 '사내 남' 한자를 쓴다. 나도 포함이다. 대놓고 아버지가 딸이라고 실망하고 싫어하고 차별했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내 이름에는 버젓이 사내가 들어있다. 개명을 하지 않는 한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사내. 처음 학교에서 내 이름을 한자로 써서 내거나, 이름 뜻에 대한 발표를 하거나, 특히 친구들이 '남'자가 사내 남이냐고 물었을 때는 많이 당황하고, 수치심마저 들었었다. 이제는 내 이름에 사내가 있다는 것을 당당히 말할 수 있지만. 부모님께서 아들을 간절히 원하셔서 이렇게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부끄럽지는 않지만 씁쓸한 마음도 있다. 아들을 바라시면서 나를 임신하고 낳으셨는데, 탯줄을 자르기도 전에 성별을 아시고 얼마나 실망스러우셨을까. 울면서 탯줄을 잘랐을 어머니 얼굴을 상상해 보니 그 시절에 여자가 겪어내야 하는 고통이 너무 큰 것 같다. 그렇다고 연민을 느끼기에는 나의 존재감은 무엇으로 보상받나. 나 스스로 내 태생과 삶을 존중하며 인정하고 격려하고.. 이것을 채우는데 인생의 반이 걸리고 있다. 50년을 살면 거의 채워지지 않을까 하며 희망을 가져본다.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누군가에게서라도 받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지난 삶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하기도 하지만, 고맙기도 하다. 그랬기에 내가 일어설 수 있었을 테니까.


 이제부터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고 싶었던 과거를 하나씩 풀어내려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닐지 모르지만. 마흔다섯의 발악이라고 해두자. 살고 보니 인생은 별 것 없고, 누가 내 과거를 안다고 해도 부끄러울 것은 없다. 단지 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힘들게 살아갈 사람들을 위하여 함께 생각을 나누고 싶은 것뿐이다. 부모를 이해하고픈 노력. 나를 왜 사랑해주지 않았느냐고,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자식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떼를 써봐도 소용없는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을 걸어보려고 한다. 그때,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본의 아니게 자유롭게 살게 된 환경을 만들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살자고. 그렇게 다짐해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그 망할 놈의 인정 욕구를 이제는 달래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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