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윤 Aug 11. 2022

패트로누스에 대하여

긴 호흡, 그 세번째



디멘터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기억으로 패트로누스를 부를지.

며칠 전 친구의 질문이었다. 디멘터를 무찌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내 행복한 기억은 무엇일까. '행복하다'고 느꼈던 수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쉽사리 정할 수는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가 뭐냐고 물으면 고민 없이 '해리 포터'라고 말할 것이다. 디멘터는 작품 속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빨아먹는 악한 존재로, 디멘터를 쫓을 수 있는 방법은 아주 행복했던 기억들을 에너지 삼아 '패트로누스 주문'을 쓰는 것뿐이다. 해리가 그 마법을 배울 때, 처음 패트로누스를 불러낼 수 있었던 기억은 그가 그리워하는 부모님과의 어린 시절 추억이었다. 나 역시도 행복한 기억들을 고르다 보니 자꾸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중학교, 마침내 초등학교 시절에 이르러 묵혀두었던 시간을 더듬었다. 철이 덜 들고, 세상을 잘 몰랐던 시절에 느꼈던 행복은 감정의 온도가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어린 아이의 감정은 타인을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 '행복한 기억'이라고 떠올릴 수 있는 순간들을 찬찬히 뜯어보니 그저 내가 그 순간에 즐거웠고, 신이 났고, 많이 웃고 있었다. 이를테면 함박눈이 오던 날, 초등학교 내내 옆집에 살았던 친구와 눈밭에서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뛰어놀았던 기억, 여름날 학교 끝나고 교회 앞 놀이터에서 친구와 웃다가 지쳐 벌러덩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던 기억, 엄마들끼리도 친했던 친구들과 가족 단위로 갔던 여행에서 밤늦게까지 풀벌레 소리 들으며 놀던 기억. 만약 지금의 내가 같은 상황에 있다면, 더러워진 옷과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고 같이 있는 사람을 의식하느라 그때만큼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 같다. 십여 년이 지나며 머릿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넣고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얻을 수 없는 때 묻지 않은 마음은 행복을 더욱 뜨겁고 큼지막하게 간직할 수 있게 한다. 

  아니면 그저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에 남은 감정이 행복 뿐일수도 있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사실 뜯어보면 '지나고 보니 시간이 약이었다' 라는 말이다. 기억 미화는 모든 인간에게 자연스레 일어나는 현상이고, 다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의 생각으로서는 '에이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어.' 라고 덤덤하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고 해서 고통스러운 순간이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에 맘껏 슬퍼하고 힘들어해야만 먼 훗날 되돌아보는 마음이 아리지 않다. 표출하지 못하고 눌러놓은 감정은 기억을 미화하는 게 아니라 썩히고 만다. 후련함보다 찝찝하고 불편한 마음만 남아 '좋은 경험'이라는 단어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회피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쁜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고 말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좋은 기억을 오래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했듯 기억은 꽤 많은 부분이 주관적이고 마음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그것들을 선별하는 것에도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나에게 2017년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 있는 해지만, 그럼에도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들이 차고 넘쳤던 과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트라우마와 같은 나쁜 기억을 겨울 솜이불처럼 무겁게 덮을 수 있는 것들은 뜨거운 온도의 좋은 기억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억을 한층 더 뜨겁게 만드는 것, 행복이 너무 커서 자연스레 그 기억을 먼저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일 년, 365일 각각의 하루 속 수많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는 기억들 속에서, 좋은 기억들이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반겼으면 한다.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모두는 사진으로 순간을 남기기 시작했고, 나 역시도 그렇다. 어쩌면 어릴 때의 행복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내 행복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전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눈에 담고 피부로 느꼈던 기억은 가공되지 않은 날것이었다. 그것들은 사진만큼 정확하진 않을지라도 생생한 그 때의 감각과 감정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시간이 흐르며 장소와 배경이 조금씩 흐려지고, 그때의 말과 행동은 모호해지지만 오히려 순간의 강렬한 행복은 그 사이에서 더 빛을 내는 것이다. 오감으로 즐기기도 바쁜 상황에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에 열중하는 내 모습은 되짚어 생각하면 참 부끄럽다. 때로는 마음에 드는 사진을 남기지 못한 것이 그날의 기분을 좌우하기도 한다. 이런 내가 당장에 사진 찍기과 sns에서 손을 떼고 초연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건 무의미할 것 같다. 

  사진은 그 순간의 행복을 오롯이 담을 때 가장 본래의 목적이 살아난다. 또는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외출의 목적이거나. 카메라에 아름답게 담기기보다 두 눈에 아름답게 담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흘려 보내지 않고 꼭꼭 씹어 삼키는 사람. 사진은 시각적인 회상을 위한 도구일 뿐 행복을 간직하려면 온 몸의 모든 감각기관을 활짝 열어야 한다.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낄 때 카메라 앱을 켜겠지만, 핸드폰 화면을 통해 주변을 바라보고 '나'를 기록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이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서른 살의 나는 올해의 행복한 순간들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힘든 시간들도 결국 미화되어 '좋은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직접 만들어가는 주관적인 기억의 창고에 점점 커다란 행복들이 담겼으면 좋겠다. 그렇게 잔뜩 힘을 비축해 놓았다가, '이게 디멘터구나' 느껴지는 고통의 순간에 창고 문을 활짝 열 생각이다. 행복한 기억들이 패트로누스가 되어 나를 지켜줄 수 있도록.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돕는 이 신비한 일은 결코 해리 포터의 판타지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마법이 아니다. 기억이 가진 힘은 마법과 같다는 것을 다시 곱씹어 생각한다. 오늘은 또 얼만큼의 행복을 쌓았나, 곰곰이 하루를 되짚다가 이렇게 여유로운 찰나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작은 행복이라는 걸 깨달았다. 


2021. 06.25

작가의 이전글 투명도 7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