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성장과 생채기, 그리고 생명

사랑과 권위

by 제니퍼씨

소녀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큰 어려움 없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가르치는 아버지, 약국 하는 엄마, 손녀들 저녁밥 손수 챙기시는 친할머니, 그리고 성실하고 착한 네 딸들, 그렇게 일곱 명 한 가족이 모두 큰 병 없이 건강하고 각자 자리에서 할 일을 하며 어려움을 삭히며 묵묵히 잘 버틴 덕분이었습니다.

소녀의 국민학교 시절 여름 방학이면 소녀의 엄마는 약국 여름휴가를 써 붙이고, 아빠는 중고 포니 뒷자리에 소녀와 세 동생을 나란히 태우고 전국의 도로를 누비며 여행하였습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던 시절이어서 친구 중에 형제자매가 넷인 친구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행 다니면서 대가족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낡은 포니 뒷자리가 좁고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소녀에게는 걱정 없는 어린 시절 가족과의 추억입니다.

여행 중에 만난 어르신 들은 딸만 넷인 것을 보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아들은 없냐며, 아들 낳는 법 알려 주겠다고 하시는 분도 계셨지만, 엄마 아빠는 웃으며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소녀가 느끼기에도 두 분의 괜찮다는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쌍둥이 동생들이 집에 처음 포대기에 안겨 들어오던 날, 딸만 넷이 되어 무거운 마음이 생길 법했음에도, 아빠는 네 딸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큰 목소리로 선언하셨던 것을 소녀는 기억합니다. 성장 과정 중에 아빠나 엄마나 심지어 할머니조차도, 우리 집에 무언가 부족하다고 하는 말을 입이 담는 것을 소녀는 들어본 적이 없고, 아들 같은 맏딸로서의 사랑을 소녀가 온전히 받았으니 이만한 복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그 나름 더디게 아무는 생채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어린 시절 기억 한편에는 할머니의 잔소리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소녀에게 "덤벙댄다", "잘 잊어버린다", "야무지지 못하다"라며 야단을 치셨고, 그 비난들은 소녀를 위축되게 만들었습니다. 비린내 나는 닭죽을 끝내 못 먹어서, 할머니는 소녀를 마당으로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소녀에게는 자신을 재단하는 말 대신 그저 있는 그대로 봐주는 따뜻함이 필요했고, 좋고 싫은 것에 대해 죄책감 없이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엄마랑 간 사립유치원 입학 면접에서 "좋아하는 음식은?"이라는 질문에 소녀는 얼결에 "파"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맛이 없는 파도 잘 먹을 줄 알아요. 칭찬해 주세요 “라는 소녀의 속마음이 묻어 나왔을지 모릅니다.

소녀가 국민학교 저학년 때 엄마가 잠시 약국을 그만두고 집에 계셨고 그 시절 소녀는 점심에 라면만 계속 끓여주어도, 집에 오면 엄마가 따뜻하게 반겨준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국민학교 5학년인가 6학년, 엄마는 약국을 개업하며 다시 일을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소녀는 엄마에게 섭섭하고 화난 마음에 방과 후에 엄마 약국에도 잘 가지 않았고 엄마에게 일부러 차갑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사춘기 무렵이라 엄마의 관심이 필요한 시기였지만, 소녀에게 엄마는 ‘부재중'인 존재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딸 네 명의 도시락을 챙겨 보내고 출근해서 밤 11시가 되어서야 돌아오는 고단한 약국 생활 속에 엄마는 어느새 소녀의 마음을 세심히 살필 여력도 없게 되었습니다. 소녀의 중고생 시절 어느 날 저녁 어두운 거실 소파에 누워 마음 한편 엄마의 위로를 바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피곤했던 엄마는 먼발치에 서서 들어가서 쉬라는 건조한 말뿐 온기를 가지고 다가와서 살펴봐주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사춘기에 접어들며 소녀에게 가장 큰 그늘을 드리운 것은 소녀 아빠의 독단적인 훈육이었습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 소녀의 열정이 향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6학년 때, 소녀는 붓글씨에 흥미를 느껴 열심히 학원을 다녔고 선생님께 칭찬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공부에 집중하지 않고 쓸데없는 것에 너무 시간을 많이 쓴다"며 못마땅해하셨고, 결국 소녀는 흥미를 느꼈던 붓글씨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훈육 방식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해 겨울, 소녀가 성탄절 찬양 연습을 너무 자주, 오랜 시간 다녀온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무술용 죽도를 들어 소녀를 체벌하기도 했습니다. 엉덩이와 다리가 퍼렇게 멍이 들도록 맞았던 그날의 기억은 자녀의 소소한 기쁨을 무력으로 꺾어버리는 상처의 기억으로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소녀에게 부모님은 학교 성적이라는 보이는 결과만 관심을 두는 멀고 차갑고 이성적인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통제는 소녀가 대학 합격한 직후에도 있었습니다. 힘든 수험 생활을 마치고 2차로 지원한 대학에 합격한 후, 소녀는 대학부 겨울 수련회에 처음 참석해 찬양하고 기도하며 온전히 은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굳이 그 산속 수련회장까지 차를 몰고 와서 소녀를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대학 입학 전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는 기간임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엇이 걱정되어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소녀는 아버지의 생각을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부가 아니면 붓글씨든, 찬양 연습이든, 수련회든, 소녀가 스스로 열정을 느끼고 에너지를 쏟으려는 모든 순간은 아버지의 독단적인 생각-무언지 모를 두려움-에 의해 차단당했습니다.

소녀는 가족 중 누구와도 일상의 느긋하고 따뜻한 대화를 하지 못했고, 소녀의 모든 가족 구성원이 그러하듯 가족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 다잡아야 했습니다.


중학교 입학 첫날, 소녀는 지각했고 교문 앞을 지키는 선생님에게 혼이 납니다. 그리고 그 이후 학창 시절 내내, 거의 매일 비슷한 시간에 지각하지 않을 만큼 늦게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간당하게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1학년 입학 직후, 담임 선생님은 젊은 여자 체육 선생님이셨는데, 입학식날 키가 큰 소녀의 첫인상이 맘에 드셨는지 소녀를 반장 선출 전에 임시 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학생들의 인기투표로 되는 반장은 하지 못했습니다.

소녀는 성격이 외향적이거나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었고, 공부도 최상위는 아니었지만 체면을 차릴 정도 수준은 유지했습니다. 무서운 아빠 덕분에 공부 외에 다른 것은 돌아볼 줄 모르는 모범생이었고, 아빠는 마뜩잖아했지만 방과 후나 주말에 선행으로 당시 유명한 학원에서 영어, 수학도 배우러 다녔습니다. 반에서 2등에서 4등 정도, 전교에서는 20 등에서 50등 사이를 오가며 부모님에게 큰 걱정을 끼치지 않을 정도의 성적은 유지했고, 학교 생활도 나름 평탄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우 관계가 넓지 않아 두 세명 친하게 지내는 친구 외에 기억이 없고, 학교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딱히 기억할 만한 추억이 없지만, 안 좋은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고, 중학교 시절 선생님과 관련된 좋지 않은 기억이 한둘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남자 물상 선생님과 관련된 것인데, 칠판에 나와서 문제를 못 풀었다고 소녀와 다른 친구들을 뒤에 일렬로 세우고 차례로 뺨을 때리는 체벌을 하였습니다. 문제를 풀지 못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받는 벌이라 혼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숙제를 너무 일찍 해 두어서 막상 앞에 나가서 푸는 방법이 기억이 잘 안 났을 뿐이기 때문에 소녀로서는 억울하고 빰을 맞는 체벌이 너무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봄인지 가을인지 날씨가 참 좋은 가사 수업시간이었는데, 소녀가 창밖에서 불어오는 한 자락 바람에 이끌려 창밖 따뜻한 햇살과 바깥 풍경에 눈길을 주고 있었습니다. 중년의 깐깐한 여선생님이었던 가사 선생님은 마치 어릴 적 소녀의 할머니 같은 엄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수업시간에 집중 안 하고 뭐 하냐며 야단을 치셨습니다. 사춘기의 치기 어린 자존심이 얼굴에 서려있었을지도 모를 무덤 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 돌리는 소녀의 태도에 선생님은 더 화가 치밀었습니다. 하지만 소녀로서는 학생도 사람인데 수업 시간이더라도 무언가 눈길을 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왜 선생님과 학생이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가 되지 못할까 하며, 밖으로 감히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 권위에 대한 분노, 반항심을 안에서 조용히 끊였습니다.


고등학교는 기독교 사립학교여서인지, 선생님들이 인간적이었고 학생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 훨씬 편안했습니다. 노래에 재능이 있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선배이자 교회 성가대 선생님 권유로 중창단에 들어가서 찬양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소녀에게 위기가 오는데, 중학교 때부터 하던 수학 선행 수업 밑천이 바닥나고, 2학년 들어 첫 모의고사에서 반에서 20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빠에게 혼이 나고, 소녀 스스로 더 이상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분류되지 않는 것에 대한 엄청난 위기감과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천만 다행히도 단기간에 전반적인 성적을 회복하고 자신감도 되찾지만 수학에 대한 부담감은 길게 남았습니다. 다행히 이듬해 정책적으로 수학 문제 난이도가 낮아져 고3 때 모의고사와 학력고사에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말 그대로 쉼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에만 집중하였습니다. 성적도 노력하는 만큼 나오던 터라, 몸은 힘들지만 심플한 생활에 정신은 오히려 평온하고 맑아졌습니다. 도시락 두 개 들고 아침 일찍 등교해서 야간 자율학습 마치고 밤 10시 넘어 돌아와서 배고파서 잠이 드니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불었던 살이 빠지고 인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에 키가 164 cm 가 넘어서 중학교 입학날 전교에서 가장 키가 컸던 소녀는, 아쉽게도 중학교 시절 이후 채 3 cm도 채 더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리가 긴 편이었고 살이 빠지자 외모를 칭찬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고3 내내 성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대입 결과까지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약학과에 무난히 합격할 것 같다며 지원했지만, 예비 2번으로 떨어졌습니다. 입시에 떨어진 소녀는 어두운 방에 혼자 벽을 보고 돌아 누워 있었습니다.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 수능이라는 새로운 시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고3 때 모든 노력을 다 했기 때문에 그녀는 재수는 절대 싫다는 마음이었고, 그녀의 부모님도 처음 겪는 일이라 재수를 시키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후기에 지원할 무렵 소녀의 아빠가 아침에 일어나서는, 꿈에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물을 보았다며 하며 소녀에게 공과대에 지원하라고 했고, 그녀는 대학에 떨어진 죄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 한 번 할 겨를 없이 아빠가 말한 공과대 어느 학과에 지원하였습니다.

소녀는 고3 시절 보았던 수십 번의 시험에서 생물을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녀에게 학과를 선택할 기회가 있고 발언권이 있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소녀의 아빠는 좋은 꿈을 꾸었고, 확신을 가지고 그가 생각하는 최선을 큰딸에게 권했고, 소녀는 늘 그랬듯이 저항 없이 순종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내내, 시시하고 싫었던 주일학교였는데 (6학년 때는 과자 먹으며 주말의 명화 보는 것이 훨씬 재밌었는데), 중학교 시절, 교회 수련회에서 은혜를 받아서, 나름 신앙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멋진 선배들도 물론 교회 생활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는 매일 시편을 읽기도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성경을 열심히 보는 시절은 성적도 더 좋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나면 머리는 환해졌습니다.


대학 시절은 그녀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냉정하게는 그녀의 인생의 암흑기였습니다. 그녀 아빠의 우려가 아마 이런 것들이었나 할 정도로 어두운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연애는 했으나 짧게 끝나거나 아주 별로였습니다. 가장 큰 비극은 신앙을 잃고 세상 즐거움을 누려보겠다고 그녀 스스로 마음을 먹은 것. 스스로를 사랑하고 소중히 다루지 않았다는 것. 연애에 있어서는 그 대상과 사랑을 정상적으로 주고받을 줄도, 대화할 줄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녀의 인생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보시니 교회는 출석했지만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도 없었습니다. 인생이 암흑처럼 캄캄했습니다. 악마가 그녀의 머리채를 꽉 움켜쥐고 놓지 않아 끌려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대학원 생활은 더 비참했습니다. 석사까지는 대구 집에서 다니면 유학을 허락하겠다는 아빠의 설득에 대학원을 대구에서 시작했지만, 배우는 것 하나 없이 고되고 낯설기만 한 실험실 생활로 곤욕을 치렀습니다. 지적 호기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 연구 내용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선배들과 교수님들, 이해할 수 없는 실험실의 권위적인 문화에 이질감을 견디기 힘들었고, 실험 약품으로 인한 독성 때문에 얼굴은 여드름으로 뒤집어졌습니다.


대학원 2년 차에 생활은 아주 깊고 깊은 수렁으로 빠졌고, 그 와중에 새벽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가르는 화단으로 차가 올라가는 큰 사고가 났습니다. 종이처럼 얇고 작은 그녀의 소형차는 거의 폐차 수준이 되어 실려 갔습니다. 그녀는 하나도 다치지 않고 걸어 나와 찌그러진 차를 처리한 뒤, 택시를 타고 무사히 집으로 가서 아침까지 단잠을 잤습니다.

큰 교통사고의 위험에서 목숨이 구해진 것은 그녀에게 이것이 두 번째인데, 그 첫 번째는 국민학교 때 횡단보도를 건널 때였습니다. 횡단보도를 가운데쯤 건너는데 소녀가 디딘 한 발짝 뒤로 오토바이가 머리를 스칠 정도로 아주 근접하게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오토바이 운전자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만약 한 발이라도 느려서 그 정도 속도로 달리는 오토바이에 부딪혔다면 소녀는 죽었거나 크게 다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의 위험에서도 소녀는 털 끗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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