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복잡한 집, 엄마 사랑에 고픈 마음
소녀의 엄마 아빠는 쌍둥이 동생들이 태어날 무렵에 범어동 할머니 집으로 다시 들어가서 합가를 했습니다. 범어2동 주택가가 개발될 때 구역에 처음으로 지어진 집, ‘1 지구 1호’였던 그 집은 소녀가 태어나기 전에 목욕탕을 하셨던 할머니가 말년을 보내시려고 지은 집입니다.
넓은 정원에는 할머니의 취향을 고스란히 담은 목단 꽃나무가 몇 줄로 나란히 심어져 밭을 이루었고, 소녀가 태어난 해에 심었다는 큰 감나무, 모과나무와 돌배나무, 자두나무 등 과실나무가 담벼락을 따라 늘어서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과수원집 맏딸로 태어나 16살에 시집오셨다는 소녀의 할머니는, 큰 키에 하얀 피부, 시원한 이목구비에 금테 안경을 끼시고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성경을 보시곤 했습니다. 소녀의 크레파스로 산이 있는 풍경이나 꽃병이 있는정물화 그림을 그리시기도 하고, 교구 찰흙으로 그릇도 예쁘게 빚는 할머니는 만약 소녀와 같은 나이로 태어나셨다면 미술을 전공하셨을 거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슬하에 세 아들을 두셨는데 소녀의 아빠가 그중 맞이입니다. 소녀의 아빠가 8살 때 6.25 전쟁 중 피난길에서 할머니는 남편을 잃고 배에 막내를 임신하고 계셨답니다. 불과 스물다섯 무렵에 혼자되신 할머니는 그 후 식당도 하시고, 목욕탕도 하시고, 당시 일본 유학하시고 돌아와 의사가 되신 큰할아버지의 지원도 받아가며 세 아들 대학 공부까지 시키셨답니다. 아들만 셋, 딸이 없어서 늘그막에 허전했었던 할머니는 첫 손녀를 무척이나 반겼고, 아침에 등산이나 산책 갈 때도 함께 가고 계모임이나 친구 모임에도 어린 소녀를 곧 잘 데리고 다녔습니다. 소녀의 어린 시절은 그래서 할머니의 사랑을 오롯이 받고 할머니와의 친밀감이 무척 깊었습니다.
하지만, 소녀가 자라면서 할머니의 어릴 적 무조전적이었던 사랑은 더 이상 느끼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넷이나 되는 손녀들을 돌보셔야 했고, 장녀인 소녀에게는 꽤 잔소리도 많이 하시고, 상처도 더러 주셨더랬습니다. 덤벙대고,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고 야단치고, 손끝이 야무지지 못하다고 핀잔주고, 어릴 때 어쩌다 한번 설거지를 하면 칭찬 대신 손이 야무진 동생과 비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그 시절 대구에서 나름 유복한 가정에 3남 1녀 외동딸로 곱게 자라 구김 없고 밝고 유순하지만 야무지고 단단한 사람입니다. 소녀의 외할아버지는 선교사로부터 전도받고 젊어서부터 사업을 하셨고 장로님으로 교회 개척도 했습니다. 소녀의 외할머니도 신앙심이 아주 깊고 곱고 정갈하신 분이셨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이화여대 의상과를 가려고 했는데 시험 전날 연탄가스를 마시고 시험을 망쳐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대구에서 약학과를 가게 되었답니다. 대학 4학년 때 외할아버지의 사업이 기울고 그 충격에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소녀의 엄마는 23살에 맞선으로 만난 아빠와 결혼을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어려워진 집안에 외할머니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려고 잘 살필 여유도 없이 서둘러 결혼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집안일도 해 본 적 없었던 소녀의 엄마는 딱하게도 억척으로 혼자 살아온 시어머니에게 신혼 초에 짧지만 호된 시집살이를 하고 유산까지 했습니다. 소녀의 아빠와 엄마는 도망하다시피 집을 나와 따로 월세 방을 얻어서 살았고, 몇 해 후에 할머니가 사기를 당해서 집만 남고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다시 합가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합가 이후에는 소녀의 아빠가 온전히 엄마 편이 되어주고, 엄마는 지혜롭게 피하고, 할머니도 점차 누그러져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딸들에게 부드러웠고 잔소리나 야단을 치지는 않았지만, 소녀에게는 늘 세명의 동생들과 사랑을 나누어 받아야 하는, 몸과 마음이 닿기 어려운 그리운 대상이었습니다.
소녀의 동생들이 어렸을 때, 한 때는 집에 할머니가 세 분이 나 계셨습니다. 친할머니, 집안일하시는 할머니, 그리고 쌍둥이 돌 무렵까지 계셨던 고모할머니까지. 그 무렵 소녀의 엄마는 직장에 다니고, 동생들은 할머니들이 나누어 돌보았습니다.
집에 사람은 가득했지만 어릴 적 소녀에게만 향했던 사랑은 이제 없었습니다. 엄마 아빠, 할머니 모두 첫사랑인 큰 딸, 큰 손녀를 사랑했지만, 소녀는 엄마의 부재에 대한 공허함이 마음 한편에 늘 있었습니다. 엄마와 닮았고 엄마의 사랑을 받는 고자질 잘하는 둘째 동생에게는 괜히 심술을 더 부리고 몰래 때리기도 했습니다. 쌍둥이 동생들은 나름 귀여웠지만, 어느새 소녀는 동생들에게 호랑이처럼 무서운 언니가 되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