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서쪽으로 가는 길

신천동 석양의 약속이 이루어지다

by 제니퍼씨

암흑기인 대학원 시절이 끝나가는 대학원 2년 차쯤, 그녀는 같은 학과 위층 실험실에서 한 남자 선배를 만났습니다. 선배가 호감을 보였지만 그녀는 딱히 설레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선배의 적극성으로 데이트처럼 몇 번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직감적으로 "헤어져야 한다"라고 생각했으나, 어쩐 일인지 마치 트랩에 잡힌 듯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교수와의 관계에서 힘들었던 선배의 감정을 들어주기에 바빴고 그녀의 직감과 감정은 깊은 우물 아래에 가라앉듯 도무지 살필 겨를이 없었고 이따금씩 감정을 길어 올려보아도 그것에 대해 스스로가 찬찬히 살펴보거나 상대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어 볼 기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선배는 감정적으로 불안도가 높았고 자존심이 세었고 열등감도 있었고 버튼이 눌러지면 때로 폭발적으로 화를 내었습니다. 때로 그녀에게 미안하다며 비굴함도 보였습니다. 그녀에게는 내키지 않는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보라고 하곤 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건강하지 않은 관계에서 벗어나야 할지 몰랐고 함께 예기를 터놓을 친구도 없었던 그녀는 고립된 섬 같은 상황에서 행복하지 않은 연애를 지속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어느 학원 강사로부터 학비와 생활비 지원을 받으며 미국 대학원을 갈 수 있다고 하는 예기를 들었고 아직 동생들이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집에서 유학 비용을 지원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마침 대학원 2년 차에 지도교수님이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떠나셔서 유학을 위한 시험 준비를 바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 졸업 무렵 입학시험 성적이 나름 구비되었지만 아주 만족할 만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집안이 갑자기 기울었던 선배는 그녀를 보며 자신도 유학을 꿈꾸고 있었고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어려워진 집안 환경에서 벗어나 유학을 꿈꾸게 할 한가닥 동아줄 같은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졸업 당시 선배는 아직 시험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고 그녀는 졸업 후 한 해 동안 정부 지원 연구원으로 지내며 스스로 좀 더 준비할 여유를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그해 여름과 초가을에 그녀는 외할머니가 계시는 외삼촌 댁에서 지내며 서울에서 유학 준비로 유명한 학원을 다녔고 선배도 서울에 직장을 다니는 친구집에 얹혀 지내며 함께 학원을 다녔습니다.

한해 더 충분히 준비한 덕이었던지, 2000년 1월, 그녀는 남보다 빠르게 대학원 합격 소식을 들었고 전액 장학금에 다달이 생활비도 받는 연구원으로서, 그녀가 바랬던 조건 그대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좋은 조건으로 입학을 하였습니다. 몇 달 후, 기적적으로 남자친구였던 선배도 비행기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의 학교에 역시 학비 전액을 받고 연구원으로서 일정 생활비도 받는 조건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미국에 막상 와서 보니 학비 전액 지원에 연구원 생활비까지 받는 경우는 당시로서도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공부했던 분야의 특수성과 당시 미국 내 경기 호황으로 연구비가 풍부했던 상황과 맞물려, 집안 경제적 상황이 도저히 되지 않음에도 유학을 꿈꿨던 두 사람에게 믿기지 않는 기적적인 일이 동시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쯤 되고 보니 그녀의 집에서는 결혼 예기가 나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이라는 먼 곳에 딸 혼자 보내기가 불안했는데 함께 유학도 떠나는 데다가 부모님도 교회 장로님 권사님이라니 그녀의 부모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찾아준 완벽한 신랑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선하신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유학 떠나기 전에 결혼 약속을 하고, 양가 부모님을 만나는 상견례를 하고, 한 학기를 마치고 겨울 방학에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하는 일정으로 식장 예약도 하고, 그녀의 마음속 깊은 갈등과는 상관없이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2000년 7월, 두 사람은 시카고까지 함께 비행기를 탔고 시카고에서 각자의 유학지로 헤어졌습니다. 공항에서 미리 한국에서 마중 나오기로 약속한 유학생을 만나 그의 차로 숙소가 될 아파트로 이동하며 그녀는 어둠 속 고속도로에서 하나님께 속으로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지금부터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가 시작되었다”라고 느끼며 어두운 창밖 풍경을 기억의 소중한 장소에 간직하였습니다.

신천동의 석양을 바라보던 여섯 살 소녀의 꿈, 미국에 가고 싶다"던 그 소원이, 26년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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