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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ㅠㄴ Apr 11. 2022

찌르는 이는 없고 찔리는 이만 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네게 말을 꺼낸 게 아니야.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네게 말을 꺼낸 게 아니야. 


목 끝까지 차 오른 말을 뱉을까, 말까, 뱉을까, 말까, 하는 사이에 정적을 참지 못 한 상대는 또 말을 덧붙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들만 쏙 쏙 골라서. 

뾰족한 말을 내뱉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고, 그런 나의 표정을 알 리없는 수화기 넘어의 상대는 또 다시 말을 꺼내어 쿡 쿡.


 전화를 끊고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도 모르는 채로 온 몸을 다 써서 울고 나니 손과 얼굴이 부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배달 음식을 많이 먹긴 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챙기지 않는데 마음을 챙길 여력이 있을 리가 있나. 세상이 무너져도 출근은 돌아오듯 주말을 눈물로 얼룩진 이에게도 월요일은 가차없이 돌아온다. 어김없이 돌아온 월요일 아침에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뛰었고, 지각을 하지 않고 커피 한 잔을 사서 회사로 출근함으로서 무사히 일주일의 시작을 선포했다. 일을 하면서 생각을 하지 않기를 생각했다. 생각을 하지 않기. 그러다 보면 내가 왜 생각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는지를 떠올리게 되고, 자연스럽게 어제 수화기 넘어의 상대에게 들은 말들을 떠올린다. 가만히 문장들을 곱씹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찌르는 사람은 없는데 찔리는 사람만 있구나. 완전한 남이 한 말이라면 신경쓰지도 않았을 말들. 어쩌면, 그 곳에 존재하는 지도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말들이 애정하는 이의 입을 거치니 새삼 아프게 느껴진다. 내가 듣고 싶은 위로의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나는 위로를 받고 싶었던 듯 하다. 다만 내 통화상대가 내가 원하는 방식의 위로를 해주는 이는 아님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상대는 나의 상태를 눈치챘고, 그렇게 나는 원치 않는 그만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냈다. 실은 그런 상대의 위로 방식은 단 한순간도 내게 위로가 된 적이 없었다. '원래 그렇다'는 식의 말 이후로 건내는 공감어린 말들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고, 내게 남는 것은 '원래 그렇다'는 말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와 긴 인연을 유지하는 이유는 우리의 어떤 면모 만큼은 아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부분 조차 비슷한 결을 띄고 있을 뿐, 우리는 다른 개체이다. 비슷한 지점을 가지고 있을 지언정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어떤 지점에서는 겹쳐있을지언정 어떤 지점에서는 결코 만나지 못 하는 각자의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결코 만날 수 없는 그 지점을 침범당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저 나의 상태를 걱정해서 들여다 본 상대에게 상처를 받을 정도의 상태라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 이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의미없는 말과 행동에도 쉽게 다치는 시기가 있다. 내 중심이 내 마음에 지나치게 가까이 있을때, 나는 상대의 마음은 보지 못한다. 내 마음과 중심 사이의 여유가 전혀 없기에, 내 마음으로 중심을 덧붙여서 코팅함으로서 지켜내고자 한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있는 내게는 상대의 말과 행동, 표정을 들여다 볼 여유가 없다.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정말 모르겠으니, 건강하게 살아남아 꾸준히 글을 쓸거라고.(완벽히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그 말이 맞다. 나는 숲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며, 눈 앞의 나무를 보면서도 다음 나무를 향해 걸어가는 바람에 이도 저도 못 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움직이던 발걸음은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봐야지. 숲도, 나무도 제대로 보지 못 하는 나는 그냥 드러누워 나무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고자 한다. 가만히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다 보면 걷고 싶어지는 날이 오겠지. 한숨을 내쉬는 대신 숨을 조금 천천히 쉬어보는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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