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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Nov 29. 2017

혐오의 무게



 

바야흐로 혐오가 판치는 시대입니다.

4~5년 전만 하더라도 이 '혐오'라는 단어를 보통의 사람들은 많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 갑자기 우리에게 '혐오'라는 말이 자주 들리게 된 걸까요?

우리는 '혐오'라는 말의 무게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혐오 : 싫어하고 미워함



지금 우리 사회가 보이고 있는 '혐오'


1. 남과 여

아마 '혐오'라는 단어 뒤에 가장 많이 붙는 단어가 '남성'과 '여성'일 겁니다.

어떤 한 '개인'이 그 개인으로서 이해받기 전에 남성과 여성으로 이해되는 것은 '비약'입니다. 

세상에 모든 인구를 남과 여 딱 두 가지로만 나누어 그 특징을 집단별로 분류하는 것은 개인의 차별성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가장 힘든 대상이 남성과 여성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이해 없는 혐오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2. 프레임 씌우기

어떠한 대상이 한 가지의 특징을 보이면 그 특징을 가지고 그 대상을 너무 쉽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고, 몰랐던 특징이 계속 나타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것은 아마 평생을 가져가야 할 숙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본인도 모르는 부분들을 타인이 추정하여 프레임을 씌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프레임을 씌워 놓으면 혐오하기가 편해집니다. 

누군가 씌워놓은 그 프레임에 맞지 않는 부분은 무시되고 들어맞는 부분이 부각되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3. 집단성과 익명성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의견이 맞는 사람과 집단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며,

나의 신상을 밝히지 않아도 내 의견을 표출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매체의 발달이 가져다준 집단성과 익명성이라는 특징을 등에 엎고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수의 의견도 집단화되어 보이기 쉽기 때문에 나의 의견을 여론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수월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겐 결사의 자유와 누군가를 싫어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보호받아야 합니다.

종종 '사람답게 살 자유'까지 빼앗을 법한 폭력들이 집단성과 익명성과 기대어 인터넷에서 이루어집니다. 


4. 상대방에 대한 무지

토론을 한다면 내 의견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설명하느냐 만큼 

상대방의 의견을 어떻게 반박하느냐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의견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하죠.

그런데 덮어놓고 내 의견만 '배출'해 낸다면 그건 토론이 아니라 각자 떠드는 것입니다.

내가 혐오하는 대상을 정말 잘 파악해야 그 혐오는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혐오라는 것의 무게는 내가 혐오하는 그 대상에게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쉽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단어보다 혐오한다는 단어를 더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아요.

누구나 팀장님, 과장님, 혹은 학교 선생님 같은 특정 개인을 싫어해본 적이 있을 거예요.

그런 경험을 해보면 알게 되죠.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내가 싫어하는 대상보다는 나에게 더 독이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겁니다.

'혐오'라는 단어가 언론이나 우리 대화에 많이 등장하는 것은 좋은 방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 혐오를 받을 상대방이 받게 될 그 무게를 한 번 생각해 봐야 될 때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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