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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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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Dec 29. 2021

평범한 노출증 환자 1

 저럴 거면 걷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느리게 뛰어다니는 정태는 교육직 공무원이다. 키가 작고 통통한 편인 그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푸른 체크 셔츠에 네이비 카디건을 걸쳤다. 패션이나 행동에서 무난함을 내뿜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 이거 보세요 제가 이렇게 무난합니다.'라고 광고라는 듯한 옷차림새이다. 언뜻 보기에는 친절해 보이지만 민원인들의 요구에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선을 그어 놓은 그는 이제 업무가 손에 익은 지 3년. 가끔 자신이 그어 놓은 그 선이 맞지 않아 민원을 맞을 때도 있지만 남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티를 내는 순간 무난한 사람이 아니라 나 힘듭니다 좀 봐주세요 하는 듯한 느낌이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대신 정태에게는 비밀이 한 가지 있다. 스스로 평범하다고 자부하는 남자치고는 굉장히 특별한 취미이다.


 정태는 노출증 환자이다. 마침 전염병이 창궐하여 길거리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이 시기에 최적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날씨도 선선한 가을 초입이라 코트를 입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무릎 윗부분을 잘라낸 레깅스를 입고 그 위에 코트를 입는다. 물론 코트를 개방하면 나체가 되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정태의 옷장엔 색깔이 다른 코트가 수십 개 있다. 혹시나 CCTV에 찍힐 때를 대비해서다. 롱 패딩도 6개 보유하고 있지만 겨울철엔 되도록이면 참는 편이다. 정태의 특이한 점은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나체에 코트만 입고 밖으로 나가 거리를 활보하더라도 절대 타인에게 자신의 나체를 보여주진 않는다. '내가 이렇게 평범해 보여도 안에는 아무것도 안 입고 있다. 너네는 절대 모를걸?'이라는 생각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타입인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하자마자 오는 길에 만두를 사 온 그는 라면과 만두를 먹고 레깅스를 무릎 위까지 올리고 그 위에 코트를 걸친다. 목까지 잠기는 코트기 때문에 언뜻 봐서는 코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옆집에서 큰 소리가 났다. 언뜻 듣기로는 부부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시작이네 저 집은....' 무심코 지나가려다 보니 오늘은 여느 때와는 조금 다르게 격렬하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 후 정적이 흘렀다. 정태는 고민했다. 이대로 그냥 자신의 취미를 즐기러 나갈지, 아니면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지 말이다. 짧은 고민 끝에 1층 버튼을 빠르게 누르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마침내 번화가로 나가려던 그때 불길한 예감이 든다. 가던 길을 멈추고 고민 끝에 112에 신고를 한다. "제 이웃집에서 부부 싸움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유리 깨지는 소리와 여자 비명소리가 들린 후 정적이 흘렀습니다." 있는 그대로 서류를 작성하듯이 신고를 했다. 근처에 있던 112 순찰차가 2분 만에 도착했다. 출동한 경찰관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경찰관들이 확인을 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괜히 이웃집 가정폭력 가해자와 마주치기 싫었던 정태는 밑에서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한다.


밑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정태는 이윽고 큰일이 났음을 확신한다. 봉고차 2대와 순찰차 2대가 더 왔기 때문이다. 곧이어 119 구급차도 보인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정태는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평범한 자신에게 닥친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흥분을 느낀다. 곧이어 이웃집 남자가 수갑을 찬 채로 연행된다. 그 남자의 옷과 얼굴에는 온통 피가 묻어 있다. 이내 광기 서린 그 남자의 눈동자가 정태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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