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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Nov 18. 2019

그 남자의 다이어리

경찰수첩

경찰관이 되어 맞은 첫 연말에 나는 '그 다이어리'를 받았다.


그 다이어리는 모든 경찰관에게 주어지는 조그마한 선물이다. 표지는 양장으로 되어 있고 경찰청 마크가 자랑스럽게 붙어 있다. 앞부분에는 달력이 있어 스케줄러로 쓸 수 있고, 그 뒤에는 노트로 사용을 하며 맨 뒤에는 세계지도,  각종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처음 그 다이어리를 받은 날의 나는 마치 안정환이 이탈리아 전에서 골든골을 넣고 두리번거리는 장면을 본, 국뽕을 심하게 맞은 초등학교 3학년 같았다. 갑자기 애국심이 솟구치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이맘때쯤의 나는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내가 제일 먼저 몸을 던져야지'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 국뽕 차오르게 만드는 다이어리'를 언제 쓸까만 고민하다가 저녁 회의 시간에 드디어 꺼내 들면 뭔가 스마트해 보였다.

파출소 저녁 회의 시간이 되면 주간팀 야간팀이 서로 교대를 한다. 그날 있었던 사건, 사고 인수인계를 하고 소장님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시간이다. 그때가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다이어리를 꺼내 들고 뭔가를 쓰기 위해 대기를 한다. 그렇지만 뭔가를 써야 기억이 될 만큼 긴 회의는 아니다. 갓 임용된 내가 봐도 이 다이어리는 가시적 효과를 위해 만들어진 노트 같았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펜과 다이어리를 들고 앉아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30년 경력의 주임님도, 어쩜 저렇게 모르는 게 없을까 싶던 40대 스마트한 부장님도 모두 그 다이어리를 들고 전투적으로 뭔가를 적기 위해 대기했지만 정작 적혀 있는 건 '퇴근하고 해야 할 일 리스트' 같은 것들이었다.


파출소 일이 손에 익어갈 때쯤 나는 웃으며 형들과 장난도 치고 간단한 일은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즈음에 나는 핸드폰을 갤럭시 노트로 바꿨다. 뭔가 스마트폰에서 멋들어진 펜을 꺼내 들어 큼지막한 화면에 노트를 하면 인텔리 한 이미지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저녁 회의 시간에 자랑스레 핸드폰에 달려 있는 펜을 꺼내 들었다. 소장님이 말씀하시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내용도 다 받아 적었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음주운전 엄금'이라는 단어도 써넣었던 것 같다. 그만큼 당연한 시간에 당연한 말을 하는 당연한 절차였다. 남들은 다 '그 경찰 다이어리'를 들고 있었고 나만 핸드폰에 적고 있다는 작은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저녁회의 시간이 끝나고 팀장님이 나를 슬쩍 불렀다. 원래 조금 고지식하고 꼰대스러운 면이 있던 그 팀장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말했다. '다이어리에다가 적으면 안 되겠냐'

잠시 그 말 뜻을 생각해보던 나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이등병과 일병들은 젓가락을 쓸 수 없고 포크 숟가락만 써야 한다던 그 선임이 생각났다. 같이 순찰차를 타던 형들은 경찰이 고지식한 집단이라며 투덜댔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런 부분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맞장구 치진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경찰이 고지식한 집단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인터넷에만 보던 프로 불편러들을 현실에서, 그것도 내 직속상관이 그런 사람이라면 참으로 어쩔 도리가 없다. '어이구 불편한 것도 많다'며 댓글을 달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저 '알겠습니다'라고 할 뿐이다.


그 사건 이후로 다이어리를 3개나 더 받았다(3년이 지났다.) 지금은 내근직으로 옮겨서 그 두꺼운 다이어리가 다 헤질 만큼 많은 내용을 그곳에 적었다. '누가 누구랑 싸웠는데 CCTV는 어디 있으며 그 집 부모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정보들이 가득하다. 1년 치 내가 했던 모든 일이 들어 있다. 앞으로도 한참 동안 나는 스마트폰 노트에 쓰기보다는 아날로그 시대를 대표하는 그 노트에 업무에 필요한 것들을 적어 넣을 것이다.


호기롭게 스마트폰으로 노트를 하던 그 젊은 경찰관은 어느새 학교전담경찰관이 되어 중학생들의 그 심오한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패드립을 아무렇지도 않게 날리는지, 왜 자꾸 친구들 괴롭히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는지, 왜 자해를 하며 희열을 느끼는지 도무지 이해 못할 일들을 자꾸 맞닥뜨린다. 이러다 문득 스마트폰에 필기하지 말고 다이어리에 하라던 그 팀장님처럼 꼰대가 되지는 않을까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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