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 전멸! 안탈리아에서 마주친 들개 떼
2020년 3월의 어느 날.
- 잔뜩 기대했던 '안탈리아' 여행은 신통치 않았다. 한 해에 1,000만 명 이상이 찾는 터키 최대의 휴양지 안탈리아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터키 최대의 유령 도시가 되었다. 복잡한 건 질색이지만 어떤 도시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하기에 매력을 갖기도 한다. 관광객이 사라진 안탈리아는 마치 긴 동면에라도 빠진 듯 조용했고 정적만이 감돌았다.
안탈리아 도심지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모래사장 근처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나있어서 훌륭한 가림막이 되어 준다. 저녁으로 파스타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여장을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키가 굉장히 크고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장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진하게 얼굴 화장을 하고 몸에 착 달라붙은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그야말로 혐오, 혐오 그 자체였다. 거대한 바퀴벌레나 흉측한 외계 생물체에게나 느낄 법한 지독한 혐오감!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이 괴수(?)는 다짜고짜 내게 이렇게 물어온다.
“혹시 너 나랑 할래?”
“(하다니? 뭘? 설마?) 아니. 나는 괜찮아.”
“왜?”
“(왜라니 이 미친놈아!) 나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
문득 호주에 있을 때 만난, 대만에서 온 레즈비언 커플과의 대화가 생각이 났다.
"너는 왜 레즈비언이 된 거야?"
"음... 사실 나는 레즈비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현재 내 파트너를 좋아하는 거거든."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비롯해서, 세상을 떠돌면서 만난 많은 LGBT들은 내 시야를 넓혀 주었고 이후 나는 성소수자를 비교적 열린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괴수는 아니다. 저 우스꽝스러운 차림새와 저급한 말투, 아무한테나 '너 나랑 할래?'라고 말하는 천박함! '아니 저런 괴수 같은 남자와 하고 싶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성욕에 찌든 사람이란 말인가!' 음... 어째 이런 일이... 세상이 말세임이 틀림없다. 그가 사라진 후, 나는 본의 아니게 끔찍한 상상에 휘말렸다. '설마 저 수풀 뒤에서 그 짓거리를 한 건 아니겠지?' 우웩...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파스타가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파스타의 흐물흐물한 감촉이 왠지 역겹게 느껴졌다. 음식 낭비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지만 정신 건강을 위해 남은 파스타를 버리고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야영하기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완벽한 은폐물이 되어 주고 바닥은 대체로 평평해서 텐트를 피기에 적합했다. 주변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한 100m 정도 떨어진 도로에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뿐이다. 가끔 안탈리아 공항을 향하는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굉음을 냈지만 해가 저물자 그 빈도가 눈에 띄게 뜸해졌다. 기온은 온화하고 하늘은 청명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침낭 안에 몸을 파묻고 곤히 잠들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오늘 밤은 꿀잠을 잘 수 있겠다.’ 행복감에 젖어 잠이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오늘밤 나는 결코 꿀잠을 잘 운명이 아니었다.
밤이 깊어가자 어디선가 동물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개였다. 이따금씩 들려오던 들개의 소리가 점점 더 빈도수가 잦아지고 더 커지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곧 댐이라도 부서진 듯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폭발적으로 들려온다. 소리와 주변의 기척으로 짐작하건대 마치 수십 마리의 들개들이 패싸움이라도 벌이는 거 같았다. 짖는 소리뿐만 아니라 달리는 소리, 깨갱거리는 소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피 터지는(?) 소리 등 들려오는 소리도 다양해졌다.
'이곳은 설마 들개들의 소굴?'
냄새를 맡은 들개 몇 마리가 내 텐트로 접근해왔다. 무서웠다. ‘저 망할 들개들이 갑자기 떼를 지어 나를 공격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었다. 한낮 같으면 당장 텐트를 박차고 나가서 들개들 몇 마리쯤 맨손으로도 처치(?)할 테지만 밤에는 그럴 수 없다. 밤의 어둠은 모든 걸 한층 더 무섭게 만든다. 밤의 들개 떼는 늑대 떼만큼이나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늑대와 들개의 유전자 차이)녀석들은 으르렁대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린다. 들개 한 마리가 내 텐트 바로 옆을 지나갈 때, 나는 숨을 죽이고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아니, 까닥할 수가 없다. 이미 공포에 지배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이 순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천만 다행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더 이상의 위험도 없었다. 다만 들개들이 패싸움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새벽 늦게까지 모래사장을 덮었다. 나는 들개들이 제발 멀리 가주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잠을 설쳐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와 복수심을 품은 채 텐트를 박차 나온다. 상황 역전! 내 꿀잠을 망친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환한 낮에는 터키의 들개 따위 비둘기만큼도 무섭지 않다. 마침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개 세 마리가 모래 위에 앉아 있다. 밤중 내내 으르렁거릴 때는 언제고 아주 평화로워 보인다. 나는 어제의 수모를 갚아줄 요량으로 ‘아아악’하고 소리를 지르며 녀석들을 향해 그야말로 미친 들개처럼 달려간다. 들개들은 깜짝 놀라서 혼비백산을 하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부리나케 도망을 친다. 나는 여전히 분이 안 풀려서 계속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쫓아 모래 위를 쏜살같이 달린다.
한바탕 울분을 풀고 나자 생뚱맞게 들개들에 대한 애정이 자라난다. 나는 원래 개에 환장하는 인간이다. 개들의 깜찍한 외모는 언제나 나를 미치게 만든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뽀뽀해주고 싶고 깨물어 주고 싶고 심지어는 먹고(?) 싶어 지기까지. 180도 돌변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인 양 교태를 부리며 녀석들을 불러 본다.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힌다. 그 어떤 개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녀석들은 그저 멀리서 나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이 꼭 나를 두고 ‘미친 사람이 분명해. 엄마가 미친 사람에게 물리면 약도 없다고 했어. 절대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되겠다.’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야 인마! 해치치 않을 테니까 잠깐만, 잠깐만 이리로 와봐. 진짜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아무 짓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