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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Feb 09. 2022

서른 살 생일에 만난 사람들

술주정뱅이, 트럭 아저씨 그리고 나

터키 3월의 어느 날 - 안탈리아 가는 길



- 이스탄불을 떠나 지중해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안탈리아를 찾아가는 길. 해가 저물기 직전 6km 정도 이어진 오르막길을 꾸역꾸역 올라 1,550m 정상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에 Mescit(이슬람 예배실)이 있어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매서운 바람 속, 나는 예배실 입구에 설치된 테이블에 앉아 저녁거리로 파스타를 준비했다. 어디선가 중년의 남자 한 명이 차를 타고 나타났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나는 '메라바(Merhaba,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홍초처럼 새빨간 얼굴과 술술 풍기는 술 냄새로부터 이 남자가 얼큰하게 취해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그는 터키 사람다운 오지랖을 발휘하며 어설프지만 자신감 넘치는 영어로 '어디서 왔어?', '어디로 가?', '몇 살이야?', '결혼했어?'라며 질문을 퍼부어 댔다.

 

말동무가 생겼다는 반가움도 잠시, 나는 그에게 조금씩 싫증이 났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터키어로 중얼대기 시작했다. 어쭙잖은 영어를 섞어가며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지라 대충 그가 우즈베키스탄 여자가 예쁘다는 둥 쓰잘데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얼굴은 어찌나 가깝게 들이대는지 그의 뜨거운 숨결이 콧등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던 중, 그는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까놓은 마늘을 하나 집어 먹었다. 얼씨구? 불쾌함이 확 치솟아 오르지만 일단 참았다. 삶은 파스타 위에 바질 페스토를 부으려는 순간, 그는 또 자신의 더러운 손가락으로 냄비 안에 파스타를 날름 집어 먹었다.


이런 빌어먹을 술주정뱅이 같으니라고!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를 있는 힘껏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자신에게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커다란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연덕스럽게 주절댄다.


“어이구. 한국까지 자전거 타고 가려면 시간 많이 걸리겠네.”
‘당신이 계속 이렇게 꼬장을 부린다면 아마 더 많이 걸리겠지요.’


그는 파스타를 좋은 안주로 여겼는지 자동차로 달려가서는 터키의 전통 증류주, 라크를 가지고 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를 철저히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라크를 한 잔 권하지만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라크는 내게는 최악의 술 중 하나였기에 매몰차게 거절했다. 과연 그도 인사불성 취한 상태는 아닌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돌변한 내 태도와 싸늘한 분위기를 눈치챘나 보다. 그는 내가 덜어준 파스타를 입안 가득 쑤셔 넣더니 “그럼 잘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역시 나도 냉혈한은 못 되는 걸까.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아저씨, 조금만 더 예의를 차리지 그랬어요.


다음 날, 신나게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길 가장자리에 빨간 무언가가 내 시선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건 토마토, 아니 토마토 무덤이었다. 누군가가 상품 가치가 없는 토마토를 무더기로 버린 거 같았다. 그 속을 뒤져가며 혹시 구조할 만한 녀석이 있나 살펴보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트럭에서 어떤 아저씨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트럭 구석탱이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챙겨 봉지에 넣더니 내게 건네주었다. 봉지 안에는 못생긴 왕토마토 한 개, 레몬 하나, 토막 난 당근 세 동강, 대파 한 뿌리가 들어있었다.


무슨 심보로 이런 먹다 남은 음식을 나한테 주는 거지,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건 순수한 감동이었다. 트럭 화물칸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라든가 매트리스, 물통 등을 보니 아저씨는 트럭 생활을 하는 거 같았다. 그런 아저씨의 삶이 결코 여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음식을 나눠주는 마음씨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가끔 사람들에게 나눔이나 기부에 대해서 물어보면 이런 대답을 종종 듣곤 한다.


“조금만 더 여유로워지면.
조금만 더 벌고 나서. 조금만 나중에.”


어쩌면 사람들은 나눔이나 기부조차도 뭔가 크고 거창한 걸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변변찮은 음식 꾸러미조차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큰 선물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때로는 그 고마운 마음씨만으로도, 작은 도움의 손길만으로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여행을 하면서 오히려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일수록 나눔의 가치를 더 잘 알고 또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1,000m의 정도의 고도를 내려간 후 산중에 텐트를 폈다. 그리고는 맥주 한 병과 슈퍼마켓에서 3,000원 주고 산 치킨너겟, 아저씨에게 받은 야채 꾸러미로 소소한 생일상을 차렸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이 순간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가족이나 친구는커녕 주변에 사람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제 만으로 서른. 조금은 더 어른이 된 걸까? 외로움을 덜 느낀다고 어른인 건 아니지만 확실히 이전보다는 혼자인 시간을 더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니게 된 거 같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생각하면 혼자이든 혼자가 아니든 소중하지 않은 게 어디 있을까. 날은 이미 어둑하고 쌀쌀했지만 모닥불이 옆에서 타닥타닥 노래를 부르며 내 곁을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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