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2020년 4월의 어느 날
카이세리(Kayseri)를 지나 300-18번 국도를 타고 달리는 중이었다. 정오를 기점으로 솔솔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이 서서히 강해지더니만 어느새 태풍이 되어버렸다. 강력한 맞바람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는커녕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기도 힘들었다.
잠시 들판 위에 빈대떡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시간을 보냈지만 바람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와중에도 노쇠한 여인은 열 살 정도로 보이는 두 아이와 함께 밭일을 하고 있다. 나도 저들도 돌풍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처지이지만 우리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나는 자진해서 이 고생을 하지만 저들은 생계를 위해서 저 고생을 한다. 내가 지금껏 내 꿈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살아남기 위해 저만한 고생을 한 적이 있었던가?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의 모습은 언제나 내 가슴에 와닿는다.
이대로 이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꾸역꾸역 자전거를 밀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욕지거리를 내뱉어 가며 한 삼 십분 정도 나아간 시점에 한쪽 면이 뻥 뚫린 석재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그 건물은 마치 '바람이 세찬 날에는 이곳으로 잠시 피하시오'라고 말하는 듯 도로변에 외롭게 서 있었다. 차라리 오체투지를 하면 했지 이런 미쳐 날뛰는 바람 속에서는 도무지 자전거를 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토바이 뒷좌석에 탄다고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모두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요동치는 바람은 돌 틈으로 들어오거나 건물의 개방된 부분을 통해 자갈과 모래들을 안쪽으로 쏟아낸다. 바람을 탄 미세한 모래 입자는 내 온몸에 들러붙었고 때로는 내 눈으로 들어왔다. 씻지도 않은 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리고 옷을 털어 보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모래 입자는 바람을 타고 끊임없이 들이쳤다. 고삐 풀린 바람은 또한 벽돌에 부딪히면서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었다. 여행하다가 건물에 깔려 죽는 참상만은 피하고 싶던 나는 몇 번인가 밖으로 나가서 건물이 무사한 지 육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문득 바깥을 보니 어떤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바람의 저항력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포화 속에 군인만큼이나 처절해 보인다. 그가 내 앞을 지나갈 때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인사치레 손을 들어 올렸고 그는 곧 핸들 방향을 틀어 내게로 다가왔다. 소위 말하는 철티비를 타고 있던 청년은 키가 컸고 단정하게 다듬어진 새까만 턱수염과 콧수염이 인상적이다. 이런 거친 날씨 속에 자전거를 탔는데도 불구하고 내 초췌하고 건조한 얼굴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밝고 깨끗했다. 그가 내게 물었다.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나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는데 지금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여기서 쉬고 있는 중이야. 나는 한국에서 왔는데 너는 어디서 왔어?”
“나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왔어. 지금 집에 돌아가는 중이야.”
“집이 어딘데?"
“우리 집은 카르스(Kars)에 있어. 원한다면 같이 가자. 너 우리 집에서 재워 줄게.”
“아! 진짜?”
이 빌어먹을 바람을 피할 수 있다면 지옥의 강이라도 건널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던 찰나 정말이지 하늘이 도우셨다. 한데 안락한 곳에서 하룻밤 머물 수 있을 거라는 기쁨도 잠시, 지도로 ‘카르스’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카르스는 터키의 동부 끝에 자리 잡은 도시로 여기서 600km나 떨어져 있었다.
“잠깐만. 내가 뭔가 오해한 거 같은데. 너희 집은 카르스에 있고 너는 지금 집에 가는 중이라고? 자전거를 타고?”
“응. 맞아.”
생긴 건 멀쩡한데 머리에 나사 몇 개가 빠진 걸까? 터키의 동부로 가면 갈수록 해발이 높아져서 더욱 추워진다. 마을 간의 거리는 더 멀어져서 때때로 식료품을 구하기가 어려워 질지도 모른다. 도로 또한 거칠어진다. 터키를 발칵 뒤집어 놓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단단한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실 나온 거 같은 차림새로 600km를 간다니? 너 자전거도 완전 고물 자전거잖아! 나는 이 생면부지의 남자의 안위가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너 오늘 밤에는 어디서 자려고?”
“근처 모스크에서 잘 생각이야. 여기서 한 10km 정도 더 가면 돼. 나는 항상 모스크에서 밤을 보내.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모스크는 고사하고 7성급 호텔에 재워준다고 해도 그를 따라가고 싶진 않았다.
“아니. 고맙지만 나는 오늘 여기서 하룻밤 묵기로 결정했어.”
“그래? 그럼 내 연락처를 알려 줄 테니 혹시 카르스에 오게 된다면 연락 줘. 나는 ‘만수르’라고 해.”
“고마워. 혹시 가게 되면 꼭 연락할게.”
그는 자신의 체격에 맞지도 않은 자전거에 올라탄 후 다시 거친 바람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애처로워 보인다. 그가 용기가 있는 건지 아니면 바보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부디 그가 카르스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여행은 참으로 신비로운 구석이 있다. 전혀 생각치 못 한 장소에 도착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때는 꿈에도 알지 못 했다. 이 생뚱맞은 만남이 내 운명을 바꿀 줄은 말이다. 코로나 때문에 얼룩진 여행이 아닌, 진정한 터키 자전거 여행의 발판을 마련하게 될 줄은 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그의 집에서 무려 9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