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8월의 어느 날 - 터키, 북동부
- 8월이 되었고 한여름이 찾아왔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된 터키의 국내 상황은 점점 호전되고 있었다. 이동 제한, 지역 봉쇄와 같은 행정 조치가 하나둘씩 해제되었다. 터키 정부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육해공의 국경을 완전히 개방하는, 이 당시로서는 아주 대담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호기를 맞아 나는 카르스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길을 나서기로 했다. 떠나기 전날, 그날따라 유난히 붉은 석양이 눈부신 장관을 연출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행장을 점검한 뒤 일찍 잠을 청했다. 하지만 역시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먼 길을 떠나기에 앞서 그 누가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을까. 내 마음은 뒤숭숭했다. 잠자리에 누워서 한동안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길 위에서 보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내 생애 가장 추웠을지 모를 지난 4월의 터키. 추운 날씨보다 나를 더욱 꽁꽁 얼어붙게 만든 건 터키 사람들의 차갑고 냉정한 태도였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였지만 그때는 너무나 힘들었다. 외면당하고, 오해받고, 쫓겨나고, 거부당했던 나날들.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사무쳐 오르더니만 갑자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눈물. 그렇게도 서러웠던 걸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나는 지금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나는 기뻐서 우는 것이다.
어렵게 시작한 자전거 여행이 전염병이라는 악재를 맞아 허무하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오랜 기다림 끝에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줄이야. 다시 한번 자연과 사람,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니. 설렘과 동시에 걱정이 마음속에 스며든다. 추운 겨울은 다 지나간 걸까? 세상은 과연 나를 반겨줄까?
다음 날, 나는 투르크메니스탄 친구들에게 간단한 작별 인사를 하고 카르스를 떠났다. 영원한 이별은 아니었다. 두고 가는 겨울 장비들을 찾으러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으니까. 도시의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길고 긴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아마 이때처럼 오르막길이 쉽고 짧게 느껴진 적도 없었던 거 같다. 내 마음속에서는 매미가 울고 있었다. 매미는 오 년의 긴 기다림 끝에 땅속에서 바깥으로 나온다. 그런 매미들이 목청 높여 울어대는 이유는 대개 짝을 찾기 위함이지만 세상 모든 게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이지도 않을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만큼은 내 눈에도 세상 모든 게 아름다워 보였다.
마을 근처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앞에 보이는 농가에서 어떤 아저씨가 나타났다. 지난날, 이런 상황에서 몇 번 쫓겨난 경우가 있어서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가보니 그는 내게 터키의 국민 음료인 아이란을 건네주었다. 집에서 손수 만든 거란다.
아이란은 물과 요구르트가 주재료인 발효유음료이다. 나는 우유도 요거트도 아닌, 요상한 맛을 가진 아이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대체 이 아이란은 정체가 뭐란 말인가. 특별히 갈증이 있던 것도 아니다. 터키의 어여쁜 시골 처자가 건네준 것도 아니다. 한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시원함이 마치 빙하수라도 마시는 거 같았다. 적당히 짭조름하고 특유의 풍미가 느껴지는 게 내 입맛에 아주 그만이었다.
아저씨는 한 컵을 단숨에 비워내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내심 ‘한 컵 더 줄까?’라는 말을 기대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홀연히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문 앞에 빈 컵을 내려놓고 조용히 내 갈 길을 갔다. 음료 한 잔 얻어 마셨을 뿐인데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해발 2,286m의 최고점을 지나서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길. 모네의 그림처럼 파스텔 색감이 물씬 풍기는 목가적이고 고즈넉한 마을들이 나를 반겼다. 그 풍경이 너무나도 예쁜 나머지 몇 번이고 자전거를 멈추고 탄성을 질렀다.
마을의 어느 농가에서는 결혼식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마침 신랑과 신부를 포함한 하객들 모두 마당에 모여서 손에 손을 잡고 터키의 전통춤을 추고 있었다. 머리가 다 벗겨진 아저씨도 젊은 남성도 히잡을 쓴 여인도 히잡을 쓰지 않은 여인도 아이들도 음악에 맞춰 몸을 들썩거렸다. 축의금 내고 밥 먹고 집에 가는 게 아니라 모두 즐겁게 춤추는 결혼식이라… 내겐 너무나도 부러운 광경이었다.
마을의 반대편 들판에서는 한 소년이 말을 타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휘날리며 허허벌판을 홀로 달리는 그에게서 유목민의 강한 기상이 느껴졌다. 소년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나도 양팔을 흔들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태양이 구름과 숨바꼭질을 하며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북쪽에서는 바람이 솔솔 불어와 내 귀를 간지럽혔다. 땅 위에는 개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들판 위에는 작은 곤충들이 알록달록한 야생화 위를 날아다녔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추운 겨울은 다 지나갔다.
그럼 다시 여행을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