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8월의 어느 날 - 악다마르 섬
- 카르스를 떠나고 일주일 후, 나는 마틴과 베로니카와 재회했다. 마틴과 베로는 카르스에서 우연히 만난 아르헨티나 친구들로 나처럼 자전거 여행자였다. 우리는 악다마르 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한 선착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렸다.
사람과의 만남을 앞두고 찾아오는 이 두근거림, 대체 얼마 만인가! 20대에는 귀찮고, 무섭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가슴 두근거리는 일을 피했다. 새로운 만남의 어색함이 싫었고 익숙지 못한 상황에서 실수를 유발하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하지만 서른을 넘어보니 이 두근거림이야말로 우리네 인생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묘약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투더와일드’의 작가가 말했듯 중요한 건 강해지는 게 아닌 강하게 느끼는 거라는 걸 말이다. 나는 언제까지고 작고 소소한 일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실 조금 걱정이 되었다. 카르스에서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고작 두어 시간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지는 미지수였다. 어쩌면 만나자고 먼저 연락한 나를 번거롭게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틴과 베로가 나타났을 때, 그건 기우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만개한 벚꽃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악다마르 섬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페리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온 남자를 만났다. 팔레스타인이라니! 중동은 지구의 화약고라고 불린다. 이렇게 불리는 문제의 근원에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비교적 평화롭게 사는 한국인인 나에게 영토와 주권 문제를 둘러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끊임없는 대립은 선뜻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 지역에서 흔히 발생하는 테러 공격이나 인권 침해의 행위들도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멀게 느껴지곤 했다.
한데 눈앞에 이러한 일들을 직접 피부로 겪고 있는 당사자가 나타나니 모든 게 달라 보인다. 이 팔레스타인 남자는 단순히 출신만으로도 보통 사람의 곱절이 넘는 절절한 사연을 갖고 있을 거 같았다.
자신을 무함마드라고 소개한 남자는 휴가를 얻어 렌터카로 터키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자 지구와 웨스트뱅크라는 제한된 지역에 갇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한 줄 알았는데... 역시 걔 중에는 이렇게 외국을 여행할 수 있는 사람도 있나 보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온 우리의 화두는 역시 팔레스타인에 관한 것이었다. 쉼 없이 이어진 대화 중에는 이런 게 있었다.
무함마드: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그건 남녀의 생리학적인 요인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차이야.”
마틴: “예를 들면?”
무함마드: “특정 직업이라든가 사회적인 책임 등을 떠안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일들 말이야.”
마틴: “글쎄. 내가 보기엔 그건 생리학적인 요인보다는 사회/문화/경제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할 거 같은데?”
무함마드도 마틴도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동성애와 낙태가 합법화되어 있는, 서구적이고 세속적인 아르헨티나에서 온 청년 마틴. 반면 가부장제가 확고하며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팔레스타인에서 온 청년 무함마드.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그들 사이에는 생각의 차이가 존재할 게 분명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성 평등을 믿는 나는 일단 마틴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무엇이 맞는지는 끝끝내 답을 내리진 못했다.
무함마드와 헤어진 후, 우리는 근처의 캠핑장에서 야영을 했다. 텐트를 치고 나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반짝였고 주위에는 풀벌레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스페인에서 여행을 시작해 지난 10월 터키에 들어왔다는 마틴과 베로. 판데믹 이후, 그들의 여행 또한 내 여행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평상시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사건들이 있었고 걔 중에는 불미스러운 일들도 따뜻한 도움의 손길도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덤덤했지만 목소리에 담긴 미묘하게 구슬픈 감정을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들의 여행담을 듣고 난 후, 나는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설사 말한다고 해도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았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숙소를 못 찾아서 이 주 넘게 샤워를 못 했던 일,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맞닥뜨린 매서운 추위, 차가운 인심 그리고 더 나아가 내 가족사와 여행을 떠나기 직전 나에게 닥친 크나큰 불행 등.
서럽고 힘들었던 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흔들리고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흐려졌다. 하지만 마틴과 베로는 내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달빛 한 점 없던 어두운 밤이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그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눈빛은 어렴풋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모든 공감과 격려 그리고 위안을.
이날 밤 나는 별똥별을 두 개나 보았다. 터키 동남부에 들어서고 난 후 유난히 별똥별을 자주 보는 거 같다. 별똥별은 긴 꼬리를 만들어내며 넓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별똥별은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마법과 같은 힘을 지녔다. 그나저나 별똥별은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사람의 인연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첫 만남부터 그랬지만 나는 마틴과 베로가 좋았다. 나는 우리의 시간이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