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10월의 어느 날 - 파타라 해변(Patara beach)
- 점심으로 먹은 시금치 피자는 최악이었다. 내가 가끔 멍청한 짓을 한다고 해도 시금치 피자를 시킬 만큼 숙맥은 아니다. 주문한 야채 피자가 시금치 피자로 감쪽같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챈 건 애석하게도 몇 입 깨물고 난 후였다. 가게의 실수는 아니었다. 마틴이 시킨 생선 요리의 생선도 바뀌어 있었으니까.(이건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다)
주문 요리를 맘대로 바꾸다니! 당장 식탁 위의 나이프를 쥐어 들고 주인장에게 달려가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우리는 그러려니 했다. 사실 이건 터키에서 종종 있는 일이었다. 재료가 부족했는지 어땠는지 속사정은 모르겠다. 하지만 뭔가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땐 일단 저지르고 보자, 라는 건 터키의 속된 장사치들이 공유하고 있는 뻔뻔한 태도였다.
식사가 끝나고 직원이 "차이?"라고 묻자 우리는 망설임 없이 "NO"라고 대답했다. 터키 식당에 가면 식사가 끝난 후 이 차이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차이가 공짜일지 아닐지 계산서를 보기까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Free?"라고 물어볼 수 있으며 대다수 식당은 차이를 공짜로 내준다. 하지만 아까의 이력으로 보아 이 식당에서 무턱대고 “Okay, please"라고 했다가는 차이의 가격을 훨씬 상회하는 정체 모를 음료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예컨대 시금치나 양배추 주스 같은 게 말이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나이프가 치워진 상황에서 음료에 꽂힌 빨대를 손에 들고 주인장에게 달려가 봤자 별 설득력이 없다는 건 누가 봐도 자명했다.
파타라 해변(Patara beach)은 그 길이가 18km, 폭은 300m 되는 터키에서 가장 긴 해변이다. 광안리 해수욕장의 길이는 1.4km, 최대폭은 110m이니 이 해변의 크기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파타라 해변의 아름다움은 마틴이 왜 이곳을 페티예에 가기 전 마지막 여행지로 선택했는지 알려주었다. 정말로 가슴이 확 트이는 풍경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마침 구름이 한 폭의 그림처럼 하늘에 걸려있어서 더욱 몽환적이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새삼 터키란 나라가 참으로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 나라가 보여주는 다양한 풍경과 색깔에 놀랄 것인가?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밤하늘에 수놓은 별을 보았을 때, 마르딘에서 광활한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보았을 때 나는 어쩌면 세상의 모든 걸 다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는 틀렸다. 세상은커녕, 터키조차 나에게 모든 걸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게 아직도 무궁무진했다. 에게해 주변은 어떨지, 흑해 주변은 어떨지 나를 설레게 하는 게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밤이 되자 해변을 찾아오던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심해 속과 같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해변 근처의 소나무 숲에서 야영을 했다. 모닥불을 피워서 석쇠 위에 에크맥을 굽고 말린 버섯이 듬뿍 들어간 국물 요리를 만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우리는 에페스 맥주를 마셨다. 문득 고개를 올려보니 소나무 사이로 밝은 보름달이 떠 있었다. 베로가 나에게 물었다.
“너 혹시 달의 얼굴을 본 적 있어?”
“달의 얼굴? 그게 뭔데?”
“말 그대로 달의 얼굴 말이야. 달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얼굴처럼 눈, 코, 입 등 생김새가 보여.”
베로가 나를 놀리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반신반의로 보름달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달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둥그런 두 눈과 오뚝한 코, 앵두 같은 입술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달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지만 똥꼬에 털이라도 나고 싶은지 갑자기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마틴이 내게 물었다.
“두호. 너는 집에 돌아가게 되면 뭘 가장 먼저 하고 싶어?”
“나는 첫날은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둘째 날은 만화책방에 가서 그동안 못 봤던 만화책을 하루 종일 읽을 거야. 너는 뭐 할 건데?”`
“나는 역시 집안에 틀어박혀서 친구랑 대마초를 신나게 피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물어본 내가 바보지. 그나저나 마침내 집에 돌아가는 소감은 어때?”
“글쎄.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네. 분명한 건 터키 여행은 최고였다는 거야. 특히 최근 3개월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거 같아.”
최근 3개월은 정확히 우리가 함께 보낸 기간이다. 나는 마틴이 이렇게 말해주어서 너무나 고마웠다.
사실 마틴과 베로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혹시 내가 그들의 여행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단 한순간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항상 잘 챙겨주었다. 하지만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가끔씩 ‘그냥 다시 혼자서 여행을 할까?’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 때면 나는 남몰래 혼자서 괴로워했다. 특히 마틴과 베로가 나란히 함께 달리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볼 때가 그랬다. 그들과 함께 하면서 외로움을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어쩐 일인지 그 순간만큼은 다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 건 역시 그들과 함께 있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동고동락하면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서로를 더 깊게 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항상 고대하던 ‘여행 중 달콤한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쌓는 우정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우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분 좋게 올라온 취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그날 밤 나를 향해 웃어 주던 달 때문이었을까? 나는 마틴과 베로에게 차례로 "I love you"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I love you’라는 말을 내뱉는 내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던 건 그 말이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내게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내뱉을 수 있는 말, 사랑해. 비록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마틴과 베로는 내 청춘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찬란했을 순간을 함께 해주었다. 나는 그들을 친구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진심으로 사랑했다.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는 지구 상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기 위해선 평균 33시간 넘는 비행시간이 걸린다. 아르헨티나의 공용어인 스페인어는 한국인이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 중 하나이고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정신과=미친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편견과 달리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정신과 상담 좀 받아봐야겠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한국인에게 아르헨티나는 물리적 거리도 문화적 거리도 엄청나게 먼 나라이다.
하지만 공통점은 얼마든지 있었다. 마틴과 베로,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었고, 에디 베더의 노래인 'Society'를 즐겨 들었으며, 공짜 숙소와 공짜 음식을 숭상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전거 여행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나는 마틴과 베로에게 말했다.
“언젠가 꼭 아르헨티나에 놀러 갈게. 대신 나 먹여주고 재어주고 즐겁게 해 주고 다 해줘야 한다. 오케이?”
“오케이!”
다음 날, 우리는 페티예 도심으로부터 북동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어느 시골 마을의 농장을 찾았다. 마틴과 베로는 이 농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지난겨울을 보냈다. 그들은 이곳을 꼭 한번 재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나타내었다.
불모지를 개척해서 만든 호주의 농장이 척박하고 거친 느낌을 준다면 이곳의 농장은 그야말로 태곳적부터 젖이 흐르고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 말뚝 하나를 박은 듯 풍요롭고 자연친화적인 느낌을 풍겼다. 나는 대번에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농장이 위치한 곳은 지대가 살짝 높았기에 주변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논과 밭, 숲이 무지개처럼 한데 어우러져 어디까지가 사유지이고 공유지인지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양팔을 쭉 벌려봐도 다 가늠할 수 없는 넓은 공간에는 오직 산들바람과 새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생명이 넘치고 평화로움이 가득했다. 낙원이란 이런 곳이 아닐까 싶었다.
농장 한가운데는 농장주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는 이 층 집이 있었다. 일 층은 거실 겸 주방과 자원봉사자들이 쓰는 방이 있고 이 층은 농장주가 혼자서 쓴다고 했다. 그 외에도 주변에 화장실 겸 샤워장이 있고 나무 위에 움막처럼 지은 집이 있어서 몇몇 자원봉사자들이 그곳을 거처로 쓰고 있었다.
거실은 주인의 고상한 취향이 한껏 묻어나는 게스트하우스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우리는 열댓 명은 앉을 수 있는 커다란 거실 식탁에 앉아 자원봉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대부분은 20대 초중반으로 터키, 러시아, 폴란드, 말레이시아 등 국적이 제각각이었다. 아랍 에미리트에서 온 친구의 이야기는 가장 먼저 우리의 흥미를 끌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공항에서 납치를 당했다고?”
“응. 공항에서 출국하려는데 진짜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모르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나를 잡아가더라고."
그는 부모와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출국하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고 한다. 납치를 당하고 한참 후에야 납치범들이 부모가 고용한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다고.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식의 납치를 사주하는 부모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는 여기서 농장 일을 배워서 나중에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내 맞은편에는 터키에서는 보기 드물게 삐쩍 마른 체형과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인상 깊은 20대 초반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얼핏 보면 공포 영화에 나오는 '사다코'를 닮았다. 조선 사람의 피가 흐르는 나는 여행자를 만나면 언제나 그들의 부모님 안부부터 물었다.
“너희 부모님은 잘 계셔?”
“모르겠어. 우리 부모님은 내가 여기에 있는지도 몰라. 아무 말도 안 하고 집을 뛰쳐나왔거든.”
아니, 이곳은 사실 농장이 아니라 가출 청년 보호소였던가? 왜 다들 부모와 서로 못 잡아먹어 난리가 난 건지. 가만히 보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는 여행자들은 평범하지 않은 가족사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몰랐다. 만족스럽지 않은 현실을 달래줄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이런 여행자들은 소설 ‘와일드’의 주인공처럼 세상을 떠돌며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더 깊은 혼돈이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결과를 얻게 되든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이러한 몸부림이 그들에게는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20대 중후반의 여자는 다행히 부모의 사주로 납치를 당한 적도, 부모와 관계를 절연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내게 가장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말했다.
“터키 사람들은 정말로 친절한 거 같아. 그거 알아? 사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는 거. 그래서 한국인인 나에게 유달리 친절한 건지도 몰라.”
“진짜? 말레이시아랑 터키도 형제의 나라인데?”
납치당했다던 남자애도 껴들었다.
“아랍 에미리트랑 터키도 형제의 나라야.”
이상하다 싶어서 검색을 좀 해보았다. 그랬더니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터키에게는 전 세계가 형제의 나라였다. 같은 이슬람 국가여서 형제의 나라이고 같은 민족이라서 형제의 나라이고 터키가 도와줬다고 형제의 나라이고 터키가 도움을 받았다고 형제의 나라이고. 지극히 터키인다운 발상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생판 모르는 터키 사람조차도 '한국은 형제의 나라, 한국인은 우리의 형제’라며 나를 친근히 대해주는 게 은근히 기분이 좋았는데 이런 거였던가?
물론 6.25 전쟁을 계기로 맺어진 한국과 터키의 인연은 남달랐다. 6.25 전쟁 당시, 터키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UN 파병군을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다섯 번째로 큰 파병 규모로 그 약속에 보답한다. 터키군은 6.25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인 군우리 전투에서 활약하는 등 우리를 위해 열심히 싸워주었다. ‘아일라(Ayla: The Daughter of War)’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터키 영화이다. 6.25 전쟁을 배경으로 터키 군인과 부모를 잃은 한국 소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는 비록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터키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터키의 그 무수히 많은 형제의 나라 중에서 한국은 ‘피로 맺힌 형제의 나라’라는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그래 왔듯, 한국인과 터키인 사이에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고 믿기로 했다.
대문이 열리고 농장주가 돌아왔다. 그에 대해서는 마틴과 베로에게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마틴은 심심찮게 나에게 이런 농담을 던지곤 했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요다 알지? 그 아저씨 요다를 닮았어.”
“진짜? 요다처럼 생긴 사람도 있구나.”
“아니. 요다처럼 현명하다고. 음. 듣고 보니 생긴 것도 좀 닮았을지도.”
실제로 본 농장주는 닮은 정도가 아니라 요다가 인간의 몸으로 환생했을 정도로 아주 붕어빵이었다.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이 요다 아저씨는 키는 땅딸막했지만 농부답게 아주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농부가 된 지는 아직 십 년이 채 안 되었고 전직 엔지니어라고 했다.) 금색 안경을 쓴 그는 머리털이 짧았고 내가 보았던 터키 사람들 중 영어를 가장 잘했다. 마틴이 얘기한 대로 그는 요다만큼 현명한 남자였다. 풍부한 삶의 경험, 그리고 오랜 세월 자연과 책에서 얻은 지식이 잘 조화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통찰력이 그의 말 한마디마다 느껴졌다. 찰스 디킨즈가 말한 '삶의 이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그가 자원봉사자들, 다시 말해 젊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데 크나큰 인상을 받았다. 아버지뻘에 가까운 나이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건 젊은 사람에게 많은 이해와 인내를 요한다. 그러나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과 어울리는 건 그 배 이상으로 더 많은 이해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요다 아저씨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귀 기울여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본인이 말을 할 때는 흔히 한 번 듣고 열 번 말하는 꼰대와는 달리 간략하게 말을 끝냈다. 나는 이런 부드러운 성품이야말로 그가 요다를 가장 닮은 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생김새나 지식에 앞서 사람은 역시 마음 씀씀이가 좋아야 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