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서핑하러 갈래?”
조수석에 앉아 있던 A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리며 물었다. 입에서는 곧바로 “아니.”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나는 급히 부연을 했다.
“잠깐 타고 종일 지쳐있을 것 같아서.”
“으응 힘들긴 하지.”
A는 다시 몸을 돌려 앉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앙상한 나무들을 보았다.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차는 매끄럽게 움직였고 쓸쓸한 겨울 풍경은 찬바람을 타고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상념에 빠져 들었다. 머릿속의 풍경은 어느새 겨울을 지나치고 따뜻한 계절에 다다랐다.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에 내가 놓여 있다. 어느 순간, 물결이 위아래로 울렁인다. 그 파도 위에서 나는 능숙하게 서핑을 한다. 그렇게 나는 존재했던 적 없는 나를 상상하고 있었다.
지난 초여름에는 서핑은커녕 맨날 이불속에 누워 있었다. 집 앞 편의점에 가는 것도 큰 결심을 필요로 했던 시기지만, 상담 하나만은 제법 성실하게 출석했다.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생명력이 바닥난 게임 캐릭터가 아이템을 먹고 간신히 되살아나는 것처럼, 나는 2주에 한 번 상담을 받으며 초주검 상태에서 조금씩 되살아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나마 상담 하루 이틀 전에 기분이 바닥을 치면 ‘내일 상담 가서 말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는데, 상담이 열흘쯤 남은 시점에서 우울함이 밀려오면 어찌할 바를 몰라 감정에 잡아먹히고는 했다. 선생님과 가벼운 농담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을 때, 이 문제에 대해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진지하게 들어주고 다정하게 대답했다.
“스트레스를 스스로 관리할 방법을 같이 찾아보도록 해요.”
구체적인 방법은 차차 찾아보기로 하고 상담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스트레스를 스스로 관리할 방법... 스트레스 관리.. 스트레스를 관리?! 스트레스를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거였어? 내겐 너무나 새로웠던 개념.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스트레스에 절절매던 것이 억울하게도 느껴졌다.
A와 헤어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바닥에 쓰러져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보며 눈을 꿈뻑거렸다. A로부터 서핑을 가자는 제안을 들은 후로 보드 위에 올라 파도를 타는 내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이사를 오며 새로 벽지를 발라 티 없이 하얀 천장은 이런저런 상상을 하기가 좋았다. 천장에 해변 하나를 그려보았다. 인적이 드문 모래사장 위에 내가 누워있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빠르게 밀려오는 파도가 꽤 가까워져서야 나는 파도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나를 덮칠 듯 닥쳐오는 파도를 앞에 두고 나는 어떻게 대처할까.
지난여름의 나였다면, ‘아, 파도가 오네.’ 생각만 하고 다시 모래사장에 뒤돌아 누웠을 것이다. 어김없이 도착한 파도는 순식간에 모래사장의 모든 것들을 휩쓸고 가고, 내가 있던 자리에 는 이제 내가 없다. 아마 순식간에 쓸려간 나는 어느 바다 깊은 곳에서 해초에 엉켜 있을 것이었다.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가만히 누워 있던 것, 그러니까 나를 덮칠 듯 닥쳐오는 스트레스 앞에서 무력하게 있었던 것은 그 모든 상황을 내가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스트레스를 관리할 방법을 찾아보자는 선생님의 말에 아직도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 했지만 이제는 안다. 파도가 치면 뒤돌아 뛰어가는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나를 공격해 오는 스트레스를 피해 도망쳐도 괜찮다는 사실을.
심지어 파도를 다루는 방법에는 파도에 올라타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A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하기는 했지만 사실 올여름에는 서핑을 배워보고 싶다. 파도를 유심히 관찰하며 보드 위에 엎드려 있다가, 적절한 순간을 틈타 상체부터 일으켜 재빨리 두 발로 서는 것. 몇 번이고 물에 빠지게 될 거란 걸 알지만, 그렇게 잠시라도 파도 위에 서볼 수 있으면 좋겠다. 수없이 물에 빠지고, 헤엄쳐 뭍으로 나오고, 다시 파도 위에 올라타는 과정을 반복한다면 언젠가는 진짜 파도 위에서도, 스트레스라는 거대한 괴물 위에서도 유연하게 서핑하는 내가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