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그 못다 한 이야기의 기록. Ep1
2024년 3월. 크로아티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이어진 12박의 신혼여행 중, 가장 선명한 '추억'의 한 조각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피렌체의 그 아침을 선택할 것입니다. 수많은 도시를 지났지만, 여행의 후반부에 다다르던 그날 아침의 산책은 유독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틈'을 만들며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의 공기는 늘 이중적입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채 가시지 않아 몸을 움츠리게 되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포근한 햇살. 제가 가장 사랑하는 봄의 날씨 속에서 그날의 산책은 시작되었습니다. 피렌체 대성당(Duomo) 바로 옆에 자리 잡았던 우리의 숙소는 문을 여는 순간 거대한 역사의 한복판으로 우리를 밀어 넣곤 했습니다.
역사도, 예술도, 그림도 잘 모르는 저에게 피렌체는 거대한 공부방이 아니라 그저 아름다운 배경이었습니다. 어떤 미술품도, 조각도 지쳐있던 저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죠. 그때부터 저는 휴대폰의 지도어플을 꺼버리고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았습니다.
어젯밤 광장에서 들려오던 노신사의 낭만적인 기타 선율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면 그 소리를 뒤쫓기도 하고, 길가에 세워진 석상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 무심히 발걸음을 옮겨보기도 했습니다. 목적지가 없었기에 우리는 무엇이든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아무것도 채우지 않았기에 모든 풍경을 온전히 담을 수 있었습니다.
산책의 끝에서 우연히 마주친 곳은 어느 미술관이었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입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저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내부의 화려한 작품들을 관람해야 한다는 의무감 대신, 그 건물이 뿜어내는 웅장한 외관과 세월의 결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건축물의 거대한 기둥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 그리고 그 빛이 만들어내는 짙은 그림자의 '틈'. 화려한 조명 아래 전시된 작품보다, 차가운 거리의 공기 속에 서 있는 이 건물의 통로가 저의 발길을 더 강렬하게 사로잡았습니다.
사진집의 표지를 장식한 이 사진을 처음 마주하면, 가장 먼저 복도 끝에 난 사각형 프레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작은 틀 안에는 피렌체의 오래된 건물들이 마치 서로의 어깨를 밀치듯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그것은 제 사진집의 첫 번째 목차이기도 한 '밀집'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숨 가쁜 일상, 빈틈없이 채워 넣어야만 했던 성취들, 그리고 여유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마음의 상태를 닮아 있죠. 멀리서 바라본 그 풍경은 화려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압박감을 줍니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보면,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두운 복도를 지탱하고 있는 굵직한 기둥들, 그리고 그 기둥 사이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그것이 바로 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틈'이었습니다.
이 틈은 가만히 서 있는 자에게는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고개를 돌려 찾아보지 않으면, 결코 다음 세상을 짐작할 수 없는 은밀한 통로이죠. 어둠이 짙을수록 기둥 사이의 빛은 더욱 선명해졌고, 기 빛은 저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습니다.
"이 어두운 통로를 지나면, 당신이 알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복도는 어둡고 길었습니다. 낯선 곳이 주는 막연한 두려움이 발목을 잡기도 했죠. 거대한 세상이 두려워 나아가지 못하면, 우리는 그 어둠 속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기둥 사이의 '틈'이 주는 용기를 믿고 발걸음을 옮기면,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둠을 통과해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저 멀리 박제되어 있던 복도 끝의 풍경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겹겹이 쌓여 답답해 보였던 건물들은 제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생경한 빛깔로 살아났고, 그 주위로 푸른 나무들과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그 화려한 세상 밖으로 온전히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 밀집된 풍경 속으로 직접 발을 내디뎠을 때 제가 마주한 것은 대단한 예술 작품이나 웅장한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엔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 끝에서 확인한 것은 '비워낸 자리에 다시 채워지는 온기'였습니다. 그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그 길을 걸어가는 것. 나를 짓누르던 밀집의 삶에서 잠시 고개를 돌려 '틈'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저는 곁에 있는 사람과 온전히 눈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저는 독자님이 제가 걸었던 이 복도를 한 걸음씩 따라 걸어 세상 밖으로 나오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에는 저는 독자님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겼습니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독자님의 마음에는 어떤 종류의 '틈'이 남아 있을까요?"
사실 정답을 바라고 묻는 질문은 아닙니다. 그저 제 사진집을 통해 독자님의 밀도 높은 삶에서 아주 작은 틈이라도 발견해 보시기를 원할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보느라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지, 그리고 당신의 삶에 숨 쉴 '틈'을 허락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