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 없는 움직임의 기록

도망칠수록 마주하게 되는 것들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Ep2

by 이틀

형체 없는 움직임의 기록

어둠이 내려앉은 동작대교 위에 카메라를 세웁니다. 셔터를 길게 열어두는 '장노출' 기법은 세상을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박제합니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대신, 수초 혹은 수분의 시간을 한 장의 프레임 속에 짓눌러 담는 것이죠.

그렇게 완성된 사진 속에서 한 명 한 명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차창 너머의 표정도, 전철 안의 고단한 어깨도 사라집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길게 늘어진 붉고 하얀 빛줄기들입니다. 수십, 수백 명의 시간이 뒤섞여 거대한 선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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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저는 제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주인공인 '1인칭 시점'의 세상에서 나는 언제나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다리 위를 무섭게 질주하는 저 빛의 궤적을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습니다. 장노출로 뭉개진 저 수많은 빛줄기 중 하나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본 세상은 거대하고 정교하게 설계된 시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의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톱니바퀴를 돌리는 '잘 끼워 맞춰진 부품'에 불과했습니다. 1인칭일 때는 특별했던 내가, 3인칭의 시점에서는 언제든 교체되어 버려도 시계 전체의 작동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소모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전철이 다리 위를 가로지르고 차들이 그 곁을 달립니다. 저는 가만히 서서 그 빛의 궤적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이 빛줄기를 만든 이들은 지금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일까요? 아니면 소중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설레는 길일까요? 어쩌면 그저 떠밀리듯 어디론가 무질서하게 흘러가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사진 속에는 수백 개의 삶이 겹겹이 쌓여 있지만, 그 누구의 이야기도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각자의 사연은 선 속에 묻히고, 오직 '이동하고 있다'는 거대한 흐름만이 틈 없이 다리 위를 메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목격한 '밀집'의 본질이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저 또한 저 빛줄기 중 하나가 되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시계의 부품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좋은 화려한 궤적을 만드느라, 정작 부품으로써 마모되어 가는 제 마음의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동작대교의 장노출 사진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서글픕니다. 개인이 지워진 채 집단적인 움직임으로만 남은 그 풍경이, 틈 없이 빽빽한 우리네 삶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밀집] 도망칠수록 마주하게 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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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저의 사진집 첫 장인 [밀집]의 정확히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사진을 기점으로 '틈없는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현 위치를 깨닫는 자각으로 이어지며, 분위기는 점점 더 어둡고 답답하게 변해갑니다.

틈이 허락되지 않는 저 불빛의 행렬 속에서, 저는 비로소 나라는 부품이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여백'을 찾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보기도 했지만, 뒤돌아본 공간 속에서 제가 마주한 것은 더욱 견고하게 밀집된 세상뿐이었습니다.


그 숨 막히는 밀집의 한복판에서, 저는 결국 저 자신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 숨을 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