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된 빛 아래에서의 이탈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Ep6
짧은 만남이었지만, 저는 이 공간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어둠 대신 파란빛이 쏟아지는 '베스티불'이라는 원형 공간에 들어섰습니다. 당시에는 이곳이 과거 황제의 찬란했던 궁전이었다는 사실도, 그 이름의 유래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천장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통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빛을 마주하는 순간, 저는 그 자리에 박제된 듯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이곳의 하늘은 수천 년의 시간을 한 줄기 빛의 궤적 속에 압축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빛은 마치 길 잃은 저를 인도하는 정교한 설계도 같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이들, 그리고 나보다 늦게 온 이들이 저마다의 소음을 남기며 스쳐 떠나갈 때까지도, 나는 그 파란빛이 흐르는 정적 아래 홀로 머물렀습니다.
저는 이 공간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하늘의 구름의 결이 끊임없이 바뀌고, 빛이 가닿는 벽돌의 위치가 조금씩 옮겨가는 것을 보며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체감할 뿐이었습니다. 빛이 훑고 지나가는 벽돌의 개수가 늘어갈수록, 마음속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도 조금씩 옅어져 갔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어야만 한다는 강박은 이곳의 수직적인 정적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각도를 관찰하며, 나는 비로소 흐르는 시간 속에 온전히 나를 맡길 수 있었습니다.
문득 주변의 소란이 잦아들고 오직 나만이 이 거대한 공간에 남겨졌음을 느꼈습니다. 비로소 저는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이탈하고 가만히 눈을 감아보았습니다.
세상과 나를 연결하던 모든 소음을 단절시키고, 오직 이 공간의 무게감에 몸을 맡기고 천장의 뚫린 틈을 통해 내려오는 빛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혹은 잃지 않기 위해 급급했던 내면의 자물쇠들이 하나둘씩 풀리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은 부품으로써의 삶을 멈추고, 다시금 한 명의 인간으로 숨을 쉬기 시작하는 찰나의 공명이었습니다.
제 사진집의 두 번째 장인 [시선;틈 너머의 발견]에 담긴 이 사진은 제가 처음 베스티불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경외감의 기록입니다.
“하늘을 벗 삼으려 작은 구멍을 내었다. 작은 틈새로 스며든 파란빛이 내 위에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 사진 이전의 기록들은 주로 물리적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간의 틈'만을 이야기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틈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피부에 직접 닿는 구원은 아니었죠. 하지만 베스티불에서 마주한 한 줄기 빛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제 내면의 긴장감을 직접 녹여버리는 실재였습니다.
이 사진을 기점으로 사진집 속의 시선은 변화합니다. 이전까지는 틈을 멀리서 응시했다면, 이후의 사진들은 어느덧 그 틈에 가까이 다가가 더 먼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저의 시선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모두가 떠나간 그 자리, 정적만이 감도는 베스티불의 한복판에서 나는 비로소 다시 눈을 떴습니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정중앙의 하늘을 응시했습니다.
바닥에 누워 바라본 하늘은 좁았습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것처럼, 사방이 막힌 채 동그랗게 잘려 나간 하늘만이 보일 뿐이었죠. 그러나 그 좁은 프레임 너머로 마주한 것은 결코 폐쇄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너머를 향한, 지독하게도 선명한 '갈망'이었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본 것은 좁은 하늘이 아니라, 그 너머의 간절한 갈망이었다.”
이 문구를 통해 저는, 스스로를 프레임 안에 가두는 행위가 때로는 가장 선명하게 진실을 마주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좁은 창은 시야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흩어져 있던 시선을 갈망 또는 희망이라는 하나의 본질로 수렴하게 합니다.
가장 좁은 창을 통해 가장 깊은 하늘을 바라보던 그 오후.
숨이 막힐 듯 견고한 정적의 한복판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이 공간을 여전히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사진집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의 두 번째 챕터 '시선'과 세 번째 챕터'사이'에 배치된 사진의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8년의 기록을 비워내고 100여 개의 사진으로 채운 저의 첫 사진집에는, 브런치에 다 담지 못한 더 깊은 사진들이 담겨 있습니다. 화면 너머로는 다 전해지지 않는 종이의 질감과,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며 마주하는 '틈'의 여정을 소장하고 싶은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진집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구매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