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낸 자리의 첫 음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Ep5
썼다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하던 마음은
끝내 낡아버린 종이 위에서 처참히 해졌다.
완벽한 곡을 써 내려가야 한다는 강박이
날카로운 연필 끝에 실려 하얀 여백을 난도질하던 밤들.
지우개 가루가 검은 눈처럼 쌓이는 동안
나의 시간은 마모되었다.
두껍던 종이는 어느덧 습기를 머금은 듯 얇아져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편이 툭, 터져버렸다.
그 찢어진 틈새에 겨우 매달린 음표 하나.
수만 개의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야
비로소 홀로 남은, 가냘프지만 선명한 점 하나.
사람들은 묻는다.
저 해진 종이 위에 어떤 노래를 꿈꿨느냐고,
그 화려했던 궤적의 뒷이야기는 무엇이었느냐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다.
지나온 불협화음의 사연을 되짚는 일은
다시 나를 그 좁은 종이 속에 가두는 일일 뿐.
찢어진 자리는 상처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된 광활한 여백이다.
비워진 캔버스 위로,
낡은 틀을 벗어난 새로운 멜로디가 길게 늘어진다.
아름답게 뭉개진 저 선들을 따라
나는 이제야 나만의 두 번째 음을 그려 넣기 시작한다.
2025년 5월, 일본 여행 중 기록한 이 사진을 떠올리면 그날의 공기와 냄새가 여전히 선명합니다. 사실 그날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비를 뚫고 웅장하게 쏟아지는 폭포를 보러 가기도 했고, 카페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여행자로서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아름다운 풍경'들이 제 곁을 스쳐 지나갔죠. 하지만 그날의 모든 기억은 해가 질 무렵, 기적처럼 나타난 단 한순간으로 수렴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세상을 적시던 비가 그치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 때쯤, 하늘은 믿기지 않을 만큼 경이로운 색으로 변해갔습니다. 모두가 하늘의 거대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제 시선은 엉뚱하게도 고가도로 밑의 아주 작은 '틈'에 머물렀습니다.
차가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가로지르는 그 좁은 프레임 너머로, 조금 전까지 비를 머금고 있던 구름들이 비쳤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줄이 그어진 공책 위에 단 하나의 음표를 그려 넣은 듯한 풍경이었습니다.
하늘을 채운 구름은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마치 누군가 수없이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 결이 다 일어나 버린 낡은 종이처럼, 거칠고 해져 있었죠.
세상은 여전히 빽빽하고 고가도로는 단단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 틈 사이로 비친 '단 하나의 음표'는 제게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이제 그만 뒷이야기는 궁금해하지 말라고. 찢어지고 해진 자리는 상처가 아니라, 새로운 선을 긋기 위한 시작일 뿐이라고 말이죠.
이 에피소드는 사진집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의 두 번째 챕터 '시선'에 배치된 사진의 이야기를 시로 담아보았습니다.
8년의 기록을 비워내고 100여 개의 사진으로 채운 저의 첫 사진집에는, 브런치에 다 담지 못한 더 깊은 사진들이 담겨 있습니다. 화면 너머로는 다 전해지지 않는 종이의 질감과,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며 마주하는 '틈'의 여정을 소장하고 싶은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진집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구매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