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틈 너머, 가장 먼 곳을 바라보는 일

일상을 떠나 다정한 일상에 도착한, 이네 마을에서의 시선 숨고르기

by 이틀

제가 무척이나 아끼는 문장, 그리고 저의 모든 여행을 관통하는 두 개의 문장 중 하나를 먼저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일상을 떠나, 일상에 도착하는 여행.
나는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지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 도착하고 싶었다.

- 모든 요일의 여행 中

교토 이네(伊根)에서의 시간은 바로 이 문장과 꼭 닮아 있었습니다.


일상에 도착하는 여행

2DY_2522.jpg 교토 소도시 이네

교토 이네의 수상가옥들이 그어내는 틈은 사람의 손때가 묻은 거칠고 투박한 나무의 살결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좁은 해안마을에서,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걸었습니다. 아니,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수상가옥들은 너도나도 뽐내듯 그 사이사이로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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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관망하던 세상이 갑자기 제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습니다. 낡은 나무집 사이의 좁은 틈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 그 너머 보이는 산과 구름들. 바다 위에는 농구공을 닮은 부표 하나가 떠 있었습니다. 마치 옆집 사는 학생이 농구 연습을 하다가 공을 바다에 빠뜨린 것만 같았죠. 이 좁은 틈은 액자 속 그림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이웃의 일상이었습니다.


2024 교토35.jpg 교토 소도시 이네

발걸음을 조금 더 옮겨 마주한 틈은 제 시선을 한층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이곳은 나무집 안의 틈이었고, 바다를 건너 마주 보이는 반대편 수상가옥들이 보였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낚시를 좋아하는지, 맞은편에 친구가 사는지, 두 개의 의자를 바닷가에 나란히 놔두었습니다. 저는 이 프레임들을 하나씩 눈으로 짚어가며, 단순한 풍경을 넘어 이곳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로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을을 빙 둘러, 조금 전 두 개의 의자가 놓여있던 맞은편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아까는 저 멀리서 이곳을 바라보았는데, 이제는 제가 그 풍경 속으로 직접 들어온 셈이죠. 관찰자로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던 시선이, 어느새 이들의 삶의 공간 안으로 쑥 들어와 밖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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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머물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빛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운 나무 기둥 틈새로 황금빛 노을을 흠뻑 머금은 건너편 숲과 지붕이 들어왔습니다. 저물어가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지붕을 보며, 저 집 안에서는 지금쯤 저녁 짓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서늘했던 바다의 푸른빛은 어느새 다정하게 잦아들고, 이 좁은 틈을 타고 내게 전달되는 것은 오직 이웃들의 따뜻한 숨결뿐이었습니다. 틈의 온도를 피부로 느끼며, 틈 밖을 맴돌던 저의 시선도 서서히 그 포근한 빛깔로 물들어갔습니다.

2024 교토36.jpg 교토 소도시 이네

그 자리에서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자, 짙은 그림자가 깔린 틈새 바닥에 얌전히 세워진 자전거 한 대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습니다. 밖에서 경이롭게 바라보던 틈의 반대편에 서서 마주한 이곳은, 누군가가 매일 아침 자전거를 끌고 하루를 시작하는 평범하고 소중한 ‘삶의 길’이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빽빽한 일상을 떠나, 기어코 도착하고 싶었던 '다정한 일상'이 바로 그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더 이상 밖에서 틈을 들여다보는 이방인이 아니라, 자전거가 세워진 그 그늘 아래 저의 시선도 가만히 내려놓으며 비로소 이들의 일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시선의 숨 고르기, 가장 먼 곳을 향하여


사실 사진집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을 넘기다 보면, 이 네 장의 이네 마을 연작 사이에 제가 의도적으로 숨겨둔 시선의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네 장의 이네 마을 연작 중 첫 번째 두 번째 사진


첫 번째와 두 번째 틈을 지나 세 번째 틈으로 넘어가기 직전, 불쑥 다른 공간의 사진 두 장이 등장합니다. 크로아티아의 페리 안에서 밖을 내다본 탁 트인 바다와, 일본 토야 호수의 빽빽한 나무 기둥 너머로 빛나는 아득한 풍경이죠.


이 사이에 놓인 두 장의 사진은 참 재미있습니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까운 곳에는 육중한 기둥과 사람들의 실루엣 등 수많은 것들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그 답답한 장애물들에 머물지 않고, 결국 그 틈을 거침없이 뚫고 나아가 가장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고 느끼게 됩니다.


가장 좁고 밀착된 이네의 골목을 걷던 중, 갑자기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이 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가장 정직한 시선은, 가장 먼 곳을 바라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저는 타인의 일상이라는 틈으로 바짝 다가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수많은 방해물 너머의 아득한 빛을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누군가의 내밀한 삶 속으로 완전히 걸어 들어가기 전, 시선을 가다듬는 저만의 의식과도 같았죠.


가까운 것들에 시야가 가려져도 기어이 먼 곳의 풍경을 느끼고야 마는 이 짧은 여백이 있었기에, 저는 다시 이네의 골목으로 돌아와 짙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자전거의 실루엣을 그토록 다정하게 껴안을 수 있었습니다. 일상을 떠나 온전한 타인의 일상에 도착하기까지, 저에게는 그렇게 한 번의 깊고 먼 숨 고르기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네 장의 이네 마을 연작 중 세 번째 네 번째 사진




이 에피소드는 사진집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의 두 번째 챕터 '시선'에 배치된 교토의 작은 마을 이네를 담은 연작 사진의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8년의 기록을 비워내고 100여 개의 사진으로 채운 저의 첫 사진집에는, 브런치에 다 담지 못한 더 깊은 사진들이 담겨 있습니다. 화면 너머로는 다 전해지지 않는 종이의 질감과,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며 마주하는 '틈'의 여정을 소장하고 싶은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진집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구매 안내

https://linktr.ee/2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