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
(내 맘대로 문학기행)
-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재능이 뛰어나거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드러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의미하는 고사성어입니다.
(붓펜으로 써보았네요)
존재감이 없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숨길수록 그 존재감은 자연스레 드러납니다. 낭중지추이니까요. 남이 몰라볼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 옆에 가면 은은하고도 그윽한 향기가 납니다.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금은 애처롭습니다. 그럴수록 존재감은 떨어집니다. 물론 자기 노력에 따라 존재감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만들어낸 허상 같은 존재감은 있으되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 옆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낭중지추 같은 그런 분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 (지은이 : 나카지마 아츠시)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스승이고 동시에 누군가의 제자이다."
서두에 나온 이 문구를 놓고 몇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제자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이 쓴 책이나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스승으로 삼고 배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 역시 내가 한 말이나 글, 또는 삶을 대하는 자세 등으로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나에게는 그런 스승이 많습니다.
인류역사에 위대한 책이나 연구 등으로 소중한 자산을 남겨주신 분들, 자신의 삶 자체로 역사의 발전을 증명하신 분들, 그리고 세상과 삶의 깊이를 이해하도록 고귀한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을 남겨주신 분들, 그리고 묵묵히 최선을 다해 현재의 삶을 살고계시는 제 주변의 민들레같으신 분들이 제 스승입니다.
이 책을 추천해서 출간되도록 하고 번역내용을 감수하신 신영복 선생님도 그중 한 분입니다. 그분의 책은 전부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브런치 글에다 소장해야 될 책으로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엽서’ '담론' 책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담론에서 이 책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어서 사서 읽게 되었습니다.
표지부터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는 이철수 화백의 간결한 판화 그림은 이 책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이 책에는 네 편의 짧은 소설이 들어있습니다. 산월기, 명인전, 제자, 이능, 이렇게 4편인데 한편 한편이 깊은 울림을 담고 있습니다.
각 편마다 중국 역사의 고전 속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책의 저자인 일본의 천재작가라 불리는 나카지마 아츠시의 상상력에 의해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제자’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능’은 사기를 쓴 사마천과 얽힌 인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산월기와 명인전은 구전동화 같은 느낌이 들었고, 제자와 이능은 실제 역사이야기처럼 읽힙니다.
기억에 남는 부분들을 옮겨봅니다.
활쏘기 천하제일의 명인이 되어 돌아온 기창이 활도 없고 어수룩한 모습이 되어 돌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지위는 행하지 않는 것이고,
지언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지사는 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활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리는 단계에 들어가는데, 그걸 듣고 그 나라에서는 당분간 화가는 붓을 감추고 악사는 비파의 현을 끊고 장인은 줄과 자를 손에 쥐는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명인이 무엇인지, 도를 깨우친 명인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실력을 뽐내려 하지 않고 그 단계마저 넘어서면 무아의 지경이 되는 건가 생각이 듭니다.
'이능' 편에서는 내가 알고 있던 사마천과 관련된 이능이라는 이름밖에 없었는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마천은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친 이능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하는 일을 겪고 사기를 집필했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사마천보다는 '이능'과 '소무'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실제 역사기록에 나온 인물들을 바탕으로 했지만 그들의 생각과 의지는 소설적 상상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진정한 충절이 무엇인지, 역사적 상황을 묵묵히 기록한 듯한 필체를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네 소설에 나온 주인공들은 뭔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궁극에 도달한 사람들의 모습이랄까요? 역사적 관계에 있던 인물들과 사건을 통해 그 관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바라보게 됩니다.
진정한 명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바라고 있는 것들은 집착이 아닌지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낭중지추처럼 숨겨도 빛이 나는 사람,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를 스스로 갈고닦으면 내 삶 안에서 고요한 향기를 품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소설 속 공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옮겨봅니다.
"뛰어나게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둘 다 변하기 어렵다."
내가 뛰어나게 어리석지 않고 그냥 좀 어리석은 정도라면 나는 아직 변화할 수 있다는데 자신감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