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다. 말하다. 읽다
(내 맘대로 문학기행)
- 보다. 말하다. 읽다
에드먼드 찰스 타벨의 "책을 읽고 있는 소녀"라는 작품입니다.
책에 빠진 걸까요?
다른 고뇌가 있는 걸까요?
턱을 괴고 책 보는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독서를 하다 보면 정신없이 빠져드는 이런 느낌이 분명 찾아옵니다. 어느 책에 꽂힐 때도 있고, 어느 한 대목에서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이나 꿈은 현실과 금방 구별이 가능합니다. 뭔가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나는 순간 현실을 깨닫죠. 그걸 못하면 심리적, 정신적 문제가 생긴 건데, 보통은 어떠한 경우라도 잘 헤쳐나갑니다. 죽을 것 같다가도 일어나고 미칠 것 같다가도 정신 차리죠. 하지만 책에 빠져있던 그 순간들은 오래오래 간직됩니다.
인간이 독서를 통해 얻는 건 이런 간접경험입니다. 그래서 책을 좀 읽은 사람은 내면이 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예방접종을 맞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 그림을 소개한 책에 나온 그림을 평한 글귀를 남겨봅니다.
"독서는 영혼에 흔적을 남긴다.
책은 배신하지 않는다."
위 그림을 보고 나서 생각난 책이 있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세 권으로 된 산문집 “보다, 말하다, 읽다”입니다. 그래서 이 세 권을 꺼내 들었습니다. 최근 6년간 김영하 작가의 글이 안 나와서 기다렸는데 작년에 한 권 나왔죠. “단 한 번의 삶”인데 회고록 성격의 에세이집입니다. 이건 다음에 리뷰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3부작 에세이는 보다', '말하다'에 이어 '읽다'로 완성되었는데 ‘읽다’가 가장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나는 왜 이상한 소설에 마음이 꽂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다행히 내가 이상한 놈이 아니라는 걸 이 책에서 알았다고나 할까요.
사실 소설은 일상적인 세계에서 허용될 수 없는 것들이 주제인 게 많습니다. 돈키호테 같은 정신분열자, 라스콜니코프 같은 살인자, 산지기와 불륜에 빠진 차타레 부인 등 이상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알 수 없는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습니다.
어찌 보면 소설 즉 이야기, 허구라는 것은 꿈처럼 진짜가 아니기에 더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현실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 주인공들, 그것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왜 우리가 나쁜 주인공에 빠지는가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문학은 독자 개개인의 양심과 내면에 조용히 호소하고 설득합니다. 소설이 가해자의 내면을 조명한다고 해서 가해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설은 우리에게 가해자의 내면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소설은 독자의 내면에 자리 잡은
독선을 해체합니다.
이것은 가해자와 연대하자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를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혹시 자기 안에도 이런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는 뜻일 겁니다. 가해자의 내면이 어느 정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한편 독자의 내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김영하의 소설도 좋지만 김영하의 에세이에서 이런 해설을 접하고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독특하면서도 이야기를 가지고 놀 줄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런 책은 소설보다 더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이번 책에서는 주로 소설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야기에 끌리는가? 여섯 꼭지를 각자의 날로 잡아 총 여섯날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첫째 날에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와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소설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마지막 여섯째 날은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답하듯이 들려주고 이야기라는 산과 바다에 뛰어들어 '책의 우주'에 접속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했던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명확해졌다고나 할까. 그 이유를 찾았다고 할까.. 하여튼 내 머리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문장들을 만났습니다. 특히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는 말에 깊이 동감합니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나의 책 읽기도 나를 분열시켜 왔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는가? 리어왕의 독백처럼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냐?'를 되새겨 봅니다.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책을 읽는 독자로 산다는 것은 현실적 보상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 이 우주 안에 많은 것들과 잠시 접속해 보고 상상해 본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보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건 돈키호테처럼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고, 차타레 부인처럼 위태로운 사랑일 수도 있고, 안나 카레니나처럼 불안한 삶일 수도 있고, 게츠비처럼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화살 같은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삶을 읽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미지의 산을 올라가는 쾌감 같은 것이 있고, 나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을 수 있는 또 다른 나를 바라보게 됩니다.
어떤 때는 작가의 말처럼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혹시 나는 너무 어두운 심연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을 영위하는 내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고민해 보게 됩니다.
아마도 이런 고민과 과정이 앞서 말한 자아를 분열시키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 읽기가 자아를 분열시키고 해체시킨다면,
그건 분명 흩어진 자아를 통해
새로운 나를 재구축시킬 수 있을 거란 믿음
또한 가져보게 됩니다.
새로 구축된 자아는 분명히 더 튼튼하게 성장해 있을 것이니까요.
신영복 선생님의 책에서 읽었던 글귀가 이 글과 닿아있는 것 같아서 여기에 옮겨봅니다.
“서삼독’(書三讀)은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세 가지를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첫째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독서는 책상 위에 올라서서 더 먼 곳을 바라보는 조망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입니다.”